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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2010년에 법정 스님이 입적했습니다.
그분이 입적한 후에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그분의 추모특집을 방영했습니다.
그 속에는 그 스님의 설법 영상도 들어있었죠.
그때 그 스님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나를 법정 큰스님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하고 말이죠.
(깨달음)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불교의 승려들은 본래 자기 자신을 ‘중’이라 불렀습니다.
‘스님’이란 말은 다른 사람이 ‘중’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죠.
예전의 선사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불교의 승려들이 자기에게 ‘님’ 자를 붙여 자기 스스로를 ‘스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자기 자신을 ‘중’이라 부르는 승려를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죠.
(적용)그렇다면 ‘목사님’이라는 호칭은 어떨까요?
목사는 자기 스스로를 ‘목사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의 종’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말이죠.
그렇지만 적지 않은 교인들이 자기 교회 목사를 가리켜 ‘주의 종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라고 부르죠.
그게 이상한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은 마치 ‘중’을 ‘스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런데 그렇게 계속 부르다 보면 목사는 어느 순간부터 ‘주의 종’이라기보다는 ‘목사님’이란 말을 더욱 선호하죠.
그러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주님의 종이 되기보다 교인들의 ‘목사님’이란 말에 도취돼 버립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종이나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보다 어느새 자기 영광만 남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목사든, 안수집사든, 권사든, 집사든,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는 신분,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사는 신분을 잊지 않아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알렉산드리아 배에 불어닥친 유라굴로 광풍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죽음의 광풍이었죠.
그 배에 올라탄 276명의 사람들은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자신들의 곡물과 재산과 중요 기구들마저 바다에 버렸죠.
그토록 위급한 상황 속에서는 곡물도 재물도 재산도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초죽음이 된 상태였는데, 그때 바울이 일어서서 말했죠.
‘내가 속한 하나님께서 어젯밤에 찾아와 내게 말씀하셨다’고 말이죠.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하고 말입니다.
물론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찾아와 말씀하신 것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죠.
2차 전도여행 때도 고린도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반대했죠.
그때 바울은 그 회당 옆에 있는 유스도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죠.
그런데 바울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지라도 혹시라도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것이었죠.
그 사실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찾아와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9-10)
(깨달음)바로 그때처럼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던 바울에게 주님께서 찾아와 말씀한 것이었죠.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두려움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일어나서 그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용기는 바울 자신에게서 일어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담대함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적용)우리도 두려움이 밀려들 때 무엇을 더욱 크게 봐야 한다고 했습니까?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나를 통해 이루실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나를 떠나지 않으실 그 하나님을 더욱 크게 바라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세상의 것이 크게 들어오면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에 밀려들지만, 내 안에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오면 세상의 두려움이 떠나가는 것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그 다음 구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24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깨달음)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찾아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한 것이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죠.
‘가이사 앞에 선다는 것’은 로마의 네로 황제 법정에 서서 판결받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미결수의 신분으로 265명과 함께 로마로 호송되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로마 황제에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법을 어긴 죄를 저지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나온 일입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바울을 만나셨을 때 하신 말씀이 있죠.
“이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한 나의 택한 그릇”이다 하고 말이죠.
그리스인들을 억압하고 교회를 잔멸하던 바울을 주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이유가 그것이라는 것이죠.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 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지금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일이요, 그 광풍조차도 하나님의 영광 속에 있는 일인 셈입니다.
(깨달음)우리가 주일날에도 살펴봤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에게 반석을 향해 명령하라고 하셨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기 누이 미리암아 죽어서 슬픔 가운데 있고 백성들은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죠.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반석을 향해 쳤고, 물이 졸졸졸 나오자 이번에는 자기 과시용으로 반석을 쳤죠.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모습이라고 했죠.
그것은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살아날 것을 천명하셨죠.
그러나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는 부활이란 말은 새겨듣지 않고 십자가에 죽는 것만 크게 들었죠.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고 가서 비난하고 책망했죠.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되고, 만약 일어난다면 자신들이 막겠다고 말이죠.
왜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면서 책망하고 비난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안위를 생각하기보다 자신들의 안위, 곧 이 땅에 누리를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릴 것을 염려한 것이었죠.
예수님께서 권좌에 오르면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뒤틀리기 때문이었죠.
그만큼 제자들과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려는 예수님의 길목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었죠.
베드로만 모세만 그러는 게 아니라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에 내 감정과 형편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려는 모습 말이죠.
오히려 이 땅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박차버리는 것 말입니다.
(적용)지금 주님께서 바울에게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한 종과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종’을 헬라어로 ‘휘페레테스’ 곧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증인’이란 말은 ‘마르튀스’ 곧 ‘순교자’란 뜻을 지닌 말이라고 했죠.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종, 주님의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중이 중의 위치에 살아가는 것이지 스님의 위치 속에 사는 것이 아니죠.
그것은 목회자가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지 목사님의 위치 속에 사는 게 아닙니다.
안수집사든 권사든 집사든, 우리 모두는 주님을 위한 종이자 주님을 위한 증인으로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중이 중의 위치를 이탈하면 스님의 자리만 탐하지 않겠느냐?”
“목사가 ‘주님의 종’의 자리를 이탈하면 ‘목사님’의 자리만 주장하지 않겠느냐?”
“바울이 로마 황제 가시아 앞에 서는 것도 자기 영광이나 자기 주장을 변론하기 위함이 아니지 않느냐?”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서는 것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주님의 종이나 주님의 증인으로 서는 것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목사요 안수집사요 권사요 집사로 어떤 직분과 자리만 원하다보면 주님의 종을 위한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겠느냐?”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서는 것도 자기 변론 자기 영광을 위한 게 아니지 않았더냐?”
“네가 이 땅에서 어떤 신분과 어떤 위치 속에 살더라도 주님을 위한 종으로 주님을 위한 증인으로 사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찬양)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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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어느 목사님이 오래 전에 부산에 살고 있는 남성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 내용입니다.
부산의 그 분은 그 당시 51세였습니다.
그분은 경제적으로 실패했고 아내와 이혼해서 가정적으로도 ‘실패한 집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이었죠.
그런데 그 분은 그 목사님이 쓴 책을 읽고서 질문하고자 그 목사님께 전화를 건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그 분에게 그 목사님이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그 목사님은 그분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집사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다는 것을 방 안에서 성경만 읽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망상이예요.”
“그런 삶은 내일을 위해 뿌리는 씨가 있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산다면 내일이면 삶이 더 악화될 것입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51년 동안 살고서도 인생을 실패했다면, 그것은 지난 51년 동안 잘못 살아온 결과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집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셨으니 설령 리어카를 끌거나 공사판 노무자로 일한다해도 지금부터 매일 하나님의 말 씀을 따라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오늘보다 더욱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산다는 것은 주님의 종처럼 주님의 증인처럼 신실하게 사는 걸 말합니다.
말씀을 앵무새처럼 외운다거나 말씀을 암송하는 것을 전부로 여긴 채 내게 주어진 삶을 신실하게 살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 삶을 책임져주시겠냐는 것이죠.
(적용)오늘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는 주님을 위한 휘페레테스, 주님을 위한 마르튀스로 부르셨죠.
그래서 바울에게 로마 황제 앞에서 서야 한다는 것처럼, 우리들도 세상 사람들 앞에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증인으로 서게 하시는 것이죠.
그런 종과 증인으로 서는 자가 어찌 거짓된 삶이나 위선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황제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서서 신실한 종과 신실한 증인으로 사는 삶을 보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실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를 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보잘 것 없고 연약할지라도,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해 주세요.”
“이 세상에 누구 앞에 서든지 바울처럼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신실한 증인으로 살게 해주세요.”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 서는 것도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증인으로 서는 모습입니다.”
“부산의 51세 그 집사님처럼 이 세상에 거짓된 삶을 살지 않게 하시고 더욱더 신실한 삶을 살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나의 삶에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주님의 영광된 종이자 증인이 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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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주님의 종이자 주님의 증인으로 부름받은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입니다.
중이 중의 자리를 이탈한 채 스님으로만 불리길 바란다면 진정한 중일 수가 없겠죠.
목회자가 주님의 종의 자리를 떠나 목사님으로만 불리길 원한다면 그 역시 주님의 종일 수가 없겠죠.
안수집사도 권사도 집사도, 우리 모두는 각각의 직분과 직책이 있지만 실은 모두가 하나님의 종이자 하나님의 증인 아닙니까?
바울이 로마황제 가이사 앞에 서는 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길이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증인으로 서는 것이었죠.
우리도 이 세상 사람들 앞에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위선과 거짓됨이 없이 신실함만 남아야 하는 자리죠.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증인으로 신실하게 살아갈 때 나머지 삶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축복의 종, 축복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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