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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어제 오늘 새벽에 묵상한 말씀은 예레미야 37장과 38장입니다.
유다 왕국 말기에 바벨론이 침략해 들어오는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죠.
거기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세상의 권력을 잡고 있는 왕과 대신들입니다.
시드기야 왕과 대표적인 네 명의 대신들이 그들이죠.
또 한 부류는 세상의 권력과 무관한 사람들, 아니 세상 권력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죠.
예레미야와 왕궁 내시인 구스 사람에 에벳멜렉입니다.
예레미야야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받은 사람이라 알 수 있지만 왕궁 내시 구스 사람 에벳멜렉은 누구이겠습니까?
에벳멜렉은 구스 사람 곧 에디오피아 사람으로 흑인이고 거세 당한 사람이죠.
당시 예레미야는 네 명의 대신들이 처넣은 구덩이에 갇혔는데, 그때 에벳멜렉이 30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를 건져냈죠.
(깨달음)그를 통해 깨닫는 게 무엇입니까?
세상에 가진 게 많고 누린 게 많은 이들은 좀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왕국의 심판을 선포해도 귀담아듣지 않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 지위, 자기 재산, 자기 권한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죠.
그로 인해 시드기야 왕이 애굽과 손을 잡고 바벨론을 몰아내려고 하다가 결국 포로로 끌려가고 두 눈이 뽑히고 말죠.
그에 반해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은 어떻게 됩니까?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대신들과 자녀들을 포로로 끌고가고 예루살렘 성을 불로 태워버리죠.
그런 상황속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죠.
너희가 바벨론으로 가려면 함께 가고, 이 땅에 남아서 살려면 그렇게 하라고 말이죠.
(적용)그만큼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시는 겁니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흑인이요 내시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를 하나님은 존중히 여겨주신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볼 때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시드기야와 네 명의 대신들은 절대로 바벨론이 침략하지 않을 거라는 자기 신념 자기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애굽과 손을 잡으면 얼마든지 바벨론을 물리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확신의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까? 아니죠.
그것은 자기 맹신이요 자기 확신일 뿐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해 신뢰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게 참 믿음이죠.
나라가 풍전등화일지라도, 내 삶이 내우외환에 휩쌓일지라도,하나님께서 처방전을 내리는 데로 순종하는 게 참된 믿음이죠.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려 바벨론의 압제를 받게 되는데 그 기간동안 회개할 기회를 삼으라는 게 하나님의 뜻이죠.
그게 수치스럽고 남보기에 부끄러울지라도 폭우를 맞아야 한다면 기꺼이 맞으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거죠.
시드기야와 궁내 대신들은 자기 맹신만 좇다가 패망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종할 때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된 것이죠.
그만큼 참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지 우리에게 깊이 일깨워주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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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바울과 함께 한 276명이 탄 알렉산드리아 배가 미항에서 뵈닉스 항구로 이동하다가 유라굴로 광풍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에게 닥친 광풍은 여태껏 한 번 경험해 보지 못한, 그들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광품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며칠 동안 해도 달도 별빛도 볼 수 없었고 급기야 자신들의 곡물과 화물과 선박의 집기도 다 바다에 던졌죠.
그렇게 여러 날을 지나는 동안 그들에게는 살 수 있다는 여력마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죽었다고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바울이 그들 사이에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구해주실 것을 선포하게 되었죠.
(본문)그것이 본문 25절에 나와 있는 말씀인데,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절)
(원해)바울은 그들 앞에 일어나 첫마디 말을 꺼낼 때도 ‘안심하라’는 말을 맨 먼저 꺼냈습니다.
이미 읽은 22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확실히 ‘안심하십시오’하는 말이죠.
우리말 ‘안심하라’는 헬라어 ‘유뒤메오’(εὐθυμέω)는 본래 ‘기뻐하다’(to be cheerful to be joyful)는 말입니다.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그들에게 바울은 오히려 ‘기뻐하라’고 선언한 것이죠.
(전개)그러면서 바울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대체 어떤 상황속에서 이런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레데 섬의 미항에서 겨울철을 나기 위해 더 큰 항구인 뵈닉스로 출항하다가 갑자기 유라굴로 광풍을 맞이한 것이죠.
그 배에 승선한 사람들은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의 광풍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었죠.
그런 초죽음이 된 상태 속에서, 바울이 일어나서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하고 선언한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믿음이 바울 자신의 신념이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겁니까?
그랬다면 그 전날 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말씀하지 않았겠죠.
바울도 실은 여러날 해와 달과 별빛이 보이지않자 죽음의 여망마저 사라진 상태였죠.
바로 그런 바울에게 주님의 사자가 찾아와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을 전해준 것이죠.
그러니 바울이 하나님을 믿노라고 고백한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지 자기 신념에서 나온 게 아닌 것이죠.
바울은 그렇게 모든 사람이 죽음의 절망에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그렇게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말이죠.
(깨달음)그렇다면 바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기에 그 광풍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고 선포했던 걸까요?
그것은 앞서 살펴 본 본문 23-24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라는 겁니까?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가 속한 하나님,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바울이 속하고자 한 게 아니라 바울이 속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이끌어주신 것이죠.
이 세상의 어떤 단체나 조직에 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과정을 거치고 치러야 할 값을 지불하게 돼 있습니다.
고등학생이 대학교에 소속되기 위해서도 입학시험을 치르고 수험료를 내야 하죠.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동창회에 소속하기 위해서도, 골프장 회원이 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죠.
골프장 회원권은 무척 비싸지 않겠습니까?
(적용)그런 이치로 따진다면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까?
골프장 회원권의 비용 정도만 내면 하나님께 속할 수 있는 일입니까?
죽었다 한들 우리는 온전한 값을 지불할 수 없는 존재죠.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그 영원하신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위해 당신의 십자가 보혈로 대속해주시는 은혜를 베푸셔서 바울이 하나님께 속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이었죠.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죠.
죄 많은 나 자신이, 지옥에 심판받아야 할 나 자신이, 하나님께 속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인 주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전개2)바울은 하나님께 속한 자기 자신을 말하면서 한 마디 더 한 게 있죠.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이죠.
(원해2)‘섬기다’는 헬라어 동사 ‘라트류오’(λατρεύω)는 ‘경배하다’(worship) ‘예배하다’(serve)는 뜻입니다.
옛날 노예가 주인을 섬길 때 사용된 단어죠.
그 당시 노예는 주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인의 발에 입맞춤으로 주인을 경배했습니다.
노예가 그렇게 주인을 경배하는 순간 노예의 몸도 마음도 시간도 주권도 다 주인의 것이란 뜻이죠.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주인의 인격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겠다는 행동의 표시입니다.
(깨달음)바울이 하나님을 향해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할 때 바로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었습니까?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바울이 경배하고 섬기기는 것이었죠.
그런데 왜 바울이 유일하신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긴다는 것입니까?
바울이 경배하겠다는 그 하나님은 그 당시 인간을 지배하던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그 신들과 같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죠.
2천 년 전 지중해 세계는 가는 곳마다 인간의 경배를 받는 신상들의 세상이었습니다.
그 당대 최고 예술가들이 빚어낸 신상들은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했는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죠.
그러나 그 신상들이 말을 합니까? 눈으로 봅니까? 그렇지 않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 조차 내지 못하는”(시115:5-7절) 돌부처일 뿐이죠.
바울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 지중해 신들은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신상들에 불과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찾아와 주시고 말씀해주시는 살아계신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특별하게 찾아나서야 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죠.
만약 그랬다면 죽음의 유라굴로 광풍에 휩쌓일 때 바울이 어디로 찾아 나서야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특정한 공간이나 특정한 시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봄날의 따사로운 햋빛 속에서도 말씀하시지만 유라굴로 폭풍 속에서도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죠.
바울은 전능하신 하나님,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마치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나, 관료의 집 구덩이에 갇혔을 때나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때 먹을 떡도 것도 없이 굶주림에 처했을때도 구스 출신의 내시 에벳멜렉을 통해 구하게 하신 하나님이셨죠.
그만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베푸신 참 믿음은 예레미야의 자기 신념이나 긍정적인 마인드에서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시위대 뜰에 갇히고 구덩이에 갇힐지라도 그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하시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바울도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는 믿음을 불어넣어주셨다는 것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참된 믿음은 내 신념이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불어넣어주시는 믿음임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렇기에 오늘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바울처럼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나님을 믿는 자이지 않더냐?”
“그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너의 신념이냐 긍정적인 사고방식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네 인생에 햇빛이 내리쬘 때만 아니라 네 인생에 유라굴로 광풍이 몰아칠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게 참된 믿음이지 않겠느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시위대 뜰에 갇히고 구덩이에 던져졌는데 그때도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네 힘이나 네 능력을 신뢰하지 말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지 않겠느냐?”
“모두가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초죽임일 때 주님께서 그 사자를 통해 바울에게 찾와주시고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듯이 말이다.”
“모두가 다른 신들에게 속해 있고, 세상의 것들을 신봉할 때, 오직 바울처럼 나와 내 집은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고백하는 믿음 말이다.”
“그 주님은 너를 살리고자 골프 회원권과는 비교도 않되는 값, 억만금을 지불해도 갚을 수 없는 죄의 값을 지불코자 십자가에 친히 못 박히신 것 아니더냐?”
“그 사랑의 하나님은 네가 언제 어떤 환경에 처할지라도 끝까지 너와 함께 하시고, 네 생명을 천국으로 인도하실때까지 친히 붙드시는 주님이지 않겠느냐?”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늘 되새기며, 그 사랑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게 참된 믿음이지 않겠느냐?”
(찬양)나 약해 있을 때에도 주님이 함께 계시고
나 소망 잃을 때에도 주님은 내게 오시네
나 시험 당할 때에도 주님이 지켜 주시고
나 실망 당할 때에도 주님이 위로 하시네
주님만이 내 힘이시며 오 주님만이 날 도우시네
오 나의 주님 내 아버지여 오 나의 주님 내 사랑이여
주님만이 내 힘이시며 오 주님만이 날 도우시네
오 나의 주님 내 아버지여 오 나의 주님 내 사랑이여
오 나의 주님 내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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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중세기 종교개혁가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학창시절 독일의 고학생들은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아 학비를 마련하곤 했다고 합니다.
물론 노래가 너무 엉망일 때나 집주인의 성품이 곱지 못하면 무안을 당하고 빈손으로 쫓겨났고요.
한번은 루터가 어느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열고 바라보는 것이었죠.
루터는 겁이 나서 냅다 뛰었는데, 그 험상궂은 사나이가 계속 좇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발이 빠르지 못한 루터는 붙잡혔고 공포에 떨고 있는데, 그 사람이 돈뭉치를 내미는 것이었죠.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루터에게 장학금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루터는 그 시절에 목소리가 좋지 않다는 열등감 속에서 노래를 불렀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이 뛰어나오는 것도 자신을 헤치기 위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고요.
그만큼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게 보이는 것이겠죠.
하지만 믿음이라는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 모든 게 감사하고 하나님의 손길로 보이는 법이겠죠.
우리가 사는 환경이 다 다르지만 그 환경을 참된 믿음의 관점으로 해석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기도)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참된 믿음은 나를 신뢰하는 것도 아니고 내 신념이나 긍정적인 마인드가 믿음이 아니네요”
“나는 약하지만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강한분이심을 믿는 것, 이 세상은 흉흉하지만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게 참된 믿음이네요.”
“루터처럼 어려운 상황속에 열등감만 갖지 말게 하시고 이 세상을 참된 믿음의 안경을 갖고 주님의 손길로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순풍도 불지만 바울처럼 역풍이 불고 심할 경우 유라굴로 광풍이 몰아치기도 하죠.
인생의 봄날을 맞이할 때도 있지만 예레미야처럼 진흙구덩이에 던져질 때도 있습니다.
루터처럼 자신을 돕고자 하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한 채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때 저와 여러분은 모든 상황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으로 해석하며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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