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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바울이 가운데 서서(행27:21-26)

by 똑똑이채널 2023.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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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가운데 서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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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현재 트뤼키예와 시리아의 지진 사망자가 4만 명이 넘어서고 있습니다.

건물이 무너진 잔해더미 속에 매몰된 이들은 2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죠.

물론 거기에는 시리아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의 지진 더미 속에 죽은 사람의 숫자는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진이 발생한 인근 지역의 건물은 모두 붕괴되었는데 유독 무너진 건물이 없어 주목받는 곳이 있죠.

인구 4만2천명 규모가 사는 에르진이라는 도시에는 사망자가 한명도 없고 무너진 건물도 없었다는 겁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 도시의 시장이 내진설계를 대비해 불법건축물을 아예 뿌리채 뽑았기 때문에 지진 피해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불법건축물과 싸워나가는 동안 그 시장이 얼마나 욕을 먹고 비난을 받았을지 알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정도를 걸을 때 큰 위기 앞에 무사히 고비를 넘길 수 있는 것이죠.

 

또 하나 놀라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시리아 북서부의 진다이리스에서 신생아가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극적으로 구조된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아랍어로 ‘기적’을 뜻하는 ‘아야노’라고 불린다는데,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겠다고 하죠.

 

그 여자 아이가 발견당시 어머니와 탯줄로 연결이 돼 있었다고 하죠.

그 어머니는 지진 직후에 진통이 시작돼 출산 후에 사망했죠.

아버지와 형제 자매 4명과 고모도 지진으로 인해 사망했고요.

 

(깨달음)그런데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 잔해 더미 속에서 살아난 이들을 보면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기쁨과 소망을 갖게 되죠.

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생존자가 있으니, 더 있을지도 모르는 기대와 소망 말이죠.

 

(적용)죄와 사망의 무덤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로마 병사가 창을 치르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그분은 누가 봐도 완전히 죽어서 시체 가운데 동굴 무덤에 안치시켰죠.

심지어 로마 병사가 그 무덤 문을 지키고 있었잖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무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 스스로 걸어나오셨습니다.

그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안겨주시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지진이나 또 다른 절망과 공포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불어넣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와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사는 자들에게는 다시금 일어서는 소망과 기쁨을 불어넣어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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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바울 일행이 무라에서 갈아탄 알렉산드리아 배는 출항하자마자 거센 풍랑을 만났죠.

그 풍랑이 얼마나 거셌는지 여러 날이 걸려서 니도 앞바다에 간신히 도착했죠.

그러나 그곳에서도 바람이 더욱 위세를 부려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그레데 섬으로 밀려났죠.

그 섬의 남쪽 해안을 끼고서 미항에 간신히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유대인들의 금식기간으로서 지중해 항해를 금지하는 시기와 맞물린 때였습니다.

 

그러니 바울로서는 다시 출항하려는 배를 멈춰세우고자 했죠.

그 시점에 항해하러 나섰다가는 사람의 목숨까지도 위태할 수 있다면서 ㅁ라이죠.

하지만 어떻게 했습니까?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서 미항보다 더 큰 뵈닉스 항구로 이동해 갔습니다.

 

왜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따랐습니까?

알렉산드리아 배는 이집트 곡물을 포함해 많은 물품들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죠.

혹시라도 미항에서 겨울을 지내다가 겨울 태풍이라도 맞이한다면 금전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볼 게 뻔했기 때문이죠.

그만큼 그들이 미항에서 뵈닉스로 나아가려는 이유는 자신들의 재물을 지키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음 출발할 때만 해도 순한 남풍이 불어와서 뵈닉스에 잘 도착할 것으로 생각했죠.

하지만 얼만 지나지 않아 갑자기 유라굴로 광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죠.

그러자 그 배 안에 탄 276명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기 시작했고, 다들 두려움에 벌벌 떨었죠.

급기야 나침반 역할을 하던 밤 하늘의 별이라도 보면 좋으련만 그것마저 보이지 않는 것이었죠.

그때 그들은 자신들이 선적한 화물들, 돈이 될만한 것들을 배에 실었던 그것들을 하나씩 자신들의 손으로 버리기 시작했죠.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것들, 그토록 돈이 된다고 믿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말이죠.

심지어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들마저, 배에 있는 탁자와 의자와 그 모든 것들마저 죄다 버려야 했던 것이죠.

 

그때 그들이 느낀 게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곡물과 화물과 선적한 재물이 될 만한 것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이었죠.

이 세상의 물질로서, 이 세상의 재물로는 결코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 말입니다.

오직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시고 구원해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임을 몸소 체험하게 되죠.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인데, 본문 21-2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 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원해)드디어 바울이 그들 가운데 일어서서 말을 한 것이죠.

모두가 초죽음이 된 상황에서, 몇날 며칠 먹지 못한 상황에서, 이제는 다 죽었다고 절망하는 그 가운데 서서 말이죠.

 

만약 자기 말을 듣고 출항하지 않았다면 이런 엄청난 타격과 손상을 면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게 첨마디였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탓하기 위해서 한 게 아니죠.

그만큼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주기 위함인 것이죠.

죽음 앞에서는 돈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돈보다 생명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각인시켜주기 위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심하라’하고 권면합니다.

‘안심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유뒤메오’(εὐθυμέω)는 ‘기뻐하다’(make cheerful, to be joyful)는 말입니다.

 

(깨달음) 바울이 왜 그렇게 말하는 걸까요?

지금 그 배에 탄 275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다고 생각할 텐데 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바울은 본문 23-26절을 통해 권고하죠.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무엇을 깨닫게 되는 말입니까?

바울이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선포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사자가 어젯밤에 자신에게 말해줬다는 것이죠.

반드시 로마 황제 앞에 네가 설 것이요, 그러니 너와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의 목숨을 다 지켜줄 것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바울은 재차 그들에게 안심하라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행하실 것이라고 권고하는 것이죠.

 

그러니 바울이 지금 ‘안심하라’고, 다시 말해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이 자신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넣어주신 말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위치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적용)우리가 새벽에 살펴봤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하는 표현히 얼마나 나올까요?

구약성경에 349회가 나옵니다.

그 중에 157회가 예레미야에 나오고 1장에 11번이나 나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뺨을 맞고 구덩이에 던져졌고 감옥에 갇힌 신세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는 멈추지 않고 그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죠.

왜죠?

그게 자기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이죠.

 

바울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바울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태장으로 매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온갖 미움을 받았죠.

그래도 거침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고, 때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기도 했죠.

 

(깨달음)그런데 오늘의 본문 중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21절 상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바울은 절망에 빠져 있는 그들 가운데 서서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서’ 말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일어서야 하는 법이죠.

뭐랄까요?

지금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가 초죽음이 돼 있는데, 바울은 그들과 정반대로 한 가운데 일어서서 선포하는 모습이죠.

 

이것은 마치 우리의 죄를 대속해 쥐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장면을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3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죠.

그런데 2천년 전에는 부활이라는 단어가 딱히 없었죠.

그런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부활이라는 헬라어 ‘아나스타시스’(άνάστασις)라는 단어 대신 ‘일어나다’는 ‘에게이로’(έγείρω)로 쓴 것이었죠.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 말은 예수님께서 죽음 가운데서 일어나셨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왜 예수님께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신 것입니까?

인간의 죄를 대신 대속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만 천하에 보여주기 위함이셨죠.

사람에게는 죽음이 절망과 두려움으로 끝나지만 우리 예수님은 죽음이 다시 일어서는 생명의 시작임을 일깨워주기 위함 말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절망과 두려움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부활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말입니다.

 

(적용)지금 바울이 죽음의 공포와 절망속에 빠져 있는 이들 앞에서 일어난 것도 그런 것 아닙니까?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다시금 일어나신 것처럼, 그래서 소망과 기쁨을 안겨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도 275명의 사람들이 죽음과 공포 속에서 벌벌 떨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을 안겨주고자 일어선 것이죠.

주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는 자들에게 죽음 가운데서 다시금 일어서는 은혜를 덧입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말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우리 주님은 절망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빠져 있는 이들로부터 일어나게 하시는 그 은혜를 우리에게도 베푸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트뤼키예와 시리아 지진으로 사망자가 4만명을 넘어서고 있는데 그 땅에는 모두 죽음과 절망과 공포가 가득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 속에서 갓 태어난 핏덩이 아이가 살아 있어 구조되는 모습을 보고 모든 이들이 소망과 기쁨을 갖지 않겠느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도 영원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모습이지 않겠느냐?”

지금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가는 276명의 사람들도 수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 벌벌 떨고 있지 않겠느냐?”

그런 그들 사이에 바울이 일어서서 하나님께서 전하도록 하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 아니더냐?”

다들 두려움과 절망과 죽음의 공포 속에 벌벌 떨고 있는 그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살다보면 지진과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들 수 있고 공황장애 같은 심리적인 압박감을 받을 때가 있지 않겠느냐?”

인생의 배를 항해하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을 겪게 되고 풍랑에 떨밀려가는 일들도 겪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때 눈을 들어 바라봐야 할 분이 누군인지 이제는 알수 있지 않겠느냐?”

죄와 사망과 죽음과 절망의 공포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 너의 생명의 주관자이지 않더냐?”

“2023년 한 해 동안 네 인생의 배를 항해할 때 배가 좌초되거나 풍랑에 떠밀려갈지라도 오직 저는 부활의 주관자이신 주님만을 바라보고 소망을 품고 살았으면 좋겠구나.”

 

(찬양)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 세계는 앞으로 날이갈수록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주님께서 종말을 맞이해 닥칠 일들임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과 상황속에서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환경과 상황이 밀려들때마다 우리가 소망을 품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다시 일어나셨기에 그 분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2023년 내 인생의 항해선에 어떤 풍랑이 밀려와도 오직 부활의 주관자이신 주님만 바라보고 그 분 소망하며 살아가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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