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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우리가 아는 아브라함과 롯은 삼촌과 조카 사이입니다.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 때문에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속였죠.
그때 애굽 왕이 사라를 아내로 취하려다가 하나님께 화를 당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애굽 왕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물과 짐승 떼를 주고 화를 면하게 되었죠.
그때 아브라함이 받은 소유물과 짐승 떼들이 많았는데, 그것을 롯과 함께 나눴습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의 짐승 떼와 롯의 짐승 떼가 점점 많아지자 함께 양을 칠 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때 어떻게 합니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라고 말했죠.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목초지를 선택할 권한을 준 것이죠.
그때 롯이 선택한 곳이 어디였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땅이었죠.
성경은 그곳을 향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13:10)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까?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의 목초지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바로 여호와의 동산 곧 에덴동산과 같이 보였고, 애굽 땅처럼 풍요와 번영을 이룰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를 머잖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풍요와 번영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풍요와 번영에 불타 없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죠.
롯은 소돔 성읍이 유황불로 멸망을 당할 때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빈 털털이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소와 양이 풍성한 상태로, 남부러울 것 없이, 더 많이 쌓아 올려보고자 해서 들어갔는데 결국 빈털터리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적용)이것은 지구 종말의 날에도, 주님의 재림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목적하는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산다면 머잖아 주님 재림하실 때 그에 걸맞는 상급을 받겠죠.
하지만 내가 목적하는 인생이 롯과 같이 풍요와 번영만을 원한다면 지구 종말의 때에 소돔성처럼 불타 없어지고 말 것들입니다.
그만큼 롯처럼 더 많이 채우고 더 많이 쌓아 올리고자 한 인생이 한 줌의 재로 끝나버린다는 것이죠.
지금도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지구 종말의 때에 주님 재림의 때에 불탄 공적처럼 사라지고 말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무라 항구를 출항한 알렉산드리아 배 총 276명을 태운 그 배는 서쪽 니도를 향해 항해했습니다.
그 방향은 로마 제국의 심장인 이탈리아 반도를 향하는 최단거리 코스였죠.
무라에서 니도까지는 뱃길로 이틀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무라 항구를 출발한 알렉산드리아 배는 ‘간신히’ 다시 말해 ‘천신만고’ 끝에 니도 앞바다에 도착했죠.
이탈리아로 향하는 서쪽으로부터 맞바람이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는 서쪽으로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었죠.
그 풍세가 서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끼 때문이죠.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배는 남쪽 그레데 섬으로 떠밀려 그 섬의 동쪽 살모네를 돌아 남쪽 해안을 바람막이로 삼아 라새아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미항에 도착했죠.
그만큼 바울을 포함해 276명이 탄 배가 얼마나 거센 풍랑을 맞았는지, 그 항해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9절을 보면 그 미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금식하는 절기’가 지난 상황으로 항해하기가 더욱 위태한 지경에 처한 때입니다.
주후 60년 대에 유대인들이 맞이한 금식일 절기는 10월 초순에 해댕되는 때였습니다.
그 절기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은 가을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지중해의 항해가 금지되는 시점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그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이 뭐라고 권합니까?
본문 9절 하반절에서 10절까지 보면 이렇게 말하죠.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이에 대해 새번역은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보기에, 지금 항해를 하다가는 재난을 당할 것 같은데, 짐과 배의 손실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까지도 잃을지 모릅니다.”
(원해) 여기에 ‘권하다’는 헬라어 ‘파라이네오’(παραινέω)는 ‘권고하다’(admonish, exhort)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 배에 승선한 사람들에게 항해의 위험성을 계속 알린 것이죠.
그 배에 태운 하물과 배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의 생명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계속 만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알렉산드리아 배에는 배를 모는 선장 외에 배의 주인인 선주도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호송하는 책임자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고 말았죠.
백부장 율리오가 왜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랐는지 12절에서 밝혀줍니다.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깨달음)무슨 말입니까?
율리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가 이곳 미항에 머물러 있을 게 아니라 더 큰 규모의 항구인 뵈닉스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으로 이동해서 이듬해 봄이 오기까지 기다리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백부장 율리오는 항해 위험을 지적하는 바울의 경고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라 뵈닉스로 이동하려 했을까요?
알렉산드리아 배는 곡물 수송 선박으로 지금 이집트의 곡물을 싣고 이탈리아로 향해 나아가는 상황입니다.
그 배의 선주에게 알렉산드리아 배와 그 배에 실린 곡물들은 모두 돈인 것이죠.
그러니 미항이라는 작은 항구에서 배가 정박해 있다가 겨울 태풍에 배가 파손당한다면 막대한 손실을 입을 것을 내다본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봉급제가 아니라 할당제로 일하고 있는 선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그 배가 파선당한다면 선장도 자신이 받을 돈을 날리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었죠.
그래서 선장과 선주는 이곳 미항보다 훨씬 더 크고 안전하다고 생각한 뵈닉스로 나아가자고 제촉했던 것이죠.
그만큼 그 배의 선장과 선주는 바울을 비롯한 죄수나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데는 전혀 중요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지키려고 한 것은 오직 그들이 재산, 그들의 이익, 그들의 막대한 부였습니다.
돈만 지킬 수 있다면, 더 많은 돈을 쌓을 수만 있다면, 사람의 생명은 아무렇게 돼도 상관이 없던 선장과 선주였던 것이죠.
(적용)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배가 순항을 합니까? 아니죠.
본문 13절 이후를 보면 남풍이 순하게 불어서 이제 출항해도 되겠다고 해서 닻을 감아 그레데 해안을 끼고 항해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그 배는 그레데 섬 해안을 바람막이로 삼아 미항에서 65km 떨어진 뵈닉스로 항해하기 시작하죠.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섬 가운데서 거대한 유라굴로 광풍이 일어났다고 14절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광풍이 얼마나 거칠고 험악한지 15절의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해주고 있습니다.
“배가 폭풍에 휘말려서, 바람을 맞서서 나아갈 수 없으므로, 우리는 체념하고, 떠밀려 가기 시작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276명을 태운 알렉산드리아 배는 통제력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6-17절을 보면 유라굴로 광풍에 휩쓸린 알렉산드리아 배는 뵈닉스에서 남서쪽으로 35km 떨어진 작은 섬 가우다 아래쪽까지 떠밀려 간 것입니다.
그때 선원들은 구명정을 뜻하는 거룻배를 간신히 갑판 위로 끌어올렸죠.
또한 선체가 광풍에 파손되지 않도록 밧줄로 선체를 가로 세로로 단단히 조여 맸습니다.
그리고 모래언덕으로 불리는 ‘스르디스’에 걸릴까봐 많은 연장들을 버리고 떠밀려 간 것이었죠.
어떤 배든 그 배가 바닷속 모래언덕에 걸리면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연장들을 죄다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유라굴로 광풍으로 맞설 수 없어서 사공들이 짐을 다 바다에 버리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왜죠?
광풍 속에서 배가 뒤집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배의 무게를 줄이고자 비상식량을 제외하고 모든 짐들을 바다에 던진 것이죠.
결국 그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그들이 우상으로 떠받들던 짐들, 하물들을 모두 바다에 내던진 것이었습니다.
19절에서는 사흘째 되는 날에는 그 배의 기구들조차 그들의 손으로 바다에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던지 그 선원들은 침구며 의자며 테이블 등 그 배의 나머지 것들까지 모두 바다속으로 버려야 했습니다.
그만큼 자기들의 손으로 귀하게 여긴 것들, 물건을 팔아 돈을 챙기고자 한 것들, 그것들을 죄다 버린 것이었습니다.
(주문)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들을 그 광풍의 현장으로 몰아넣은 것입니까?
누가 그들의 소유물을 모두 바다에 내 던지게 한 것입니까?
그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선주와 선장, 그 배에 타고 가서 물건을 팔고자 한 선원들 아닙니까?
사람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재물을 지키고 쌓고자 뵈닉스로 가려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것이죠.
그래서 안되겠다 싶었는지 돈이 될만한 것들을 모두 내다 버린 것들 아닙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재물보다 소중한 게 그들의 생명임을 알았기 때문이죠.
마치 롯이 가죽과 재물을 더 많이 늘리고 더 많이 쌓아 올릴 것으로 생각해 소돔과 고모라 땅을 향해 나아갔지마 빈 털털이로 빠져나온 것과 같은 격이죠.
자신이 지키고 더 쌓고자 한 재물은 결국 자기 목숨조차, 가족의 목숨조차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낀 것이었습니다.
(주문)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께서는 우리가 쌓아 올리고자 한 부와 재물들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깊이 있게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나아가 많은 부와 가축을 거느리고 쌓아보려 했지만 모두 불타버린 걸 알고 있지 않느냐?”
“롯이 떠나간 뒤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교제하며 살았는데, 롯도 그걸 신앙의 참된 거울로 삼았어야 하지 않았겠느냐?”
“본문에 나오는 알렉산드리아 배의 선장과 선주와 선원들의 모습을 통해 롯의 모습을 비춰주는 것 아니더냐?”
“이 땅을 살아가면 재물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목적으로 사는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너에게 일깨워주는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이땅의 재물이 중요하지만 재물만 좇아가다가는 알렉산드리아 배처럼 광풍을 만나 모두 내다 버려야 할 것들이지 않겠느냐?”
“바울처럼 사람의 생명과 목숨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의 생명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명을 좇아 너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의 기쁨을 좇아 사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좇아 살면 그 광풍 속에서 생명을 건져올리는 은혜를 누리게 하지 않겠느냐?”
(찬양)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활짝 피는 백합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피어나는 꽃 되리라 오 하나님 이 꽃 바쳐 주의 재단 밝히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논지)재물 곧 돈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6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해주는 말씀입니까?
주님께서는 돈 자체를 악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선언하신 셈이죠.
돈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인생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든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순간부터 주님을 등지기 마련이요 결과적으로 그 돈이 자신을 찔러 해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제조업자들이 유해식품과 불량상품을 만들어 파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왜 건설업자들이 불량시공을 하는 것입니까?
왜 운송업자들이 과적을 일삼는 것입니까?
유흥업소가 왜 번창합니까?
왜 대기업의 부당거래와 횡포와 갑질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까?
모두가 돈 때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자기 생명을 찌르는 것임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깊이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예화)오래 전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총수의 장남과 차남이 재산 다툼을 벌여 온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그 당시 재벌닷컴에 따르면 장남 재산은 1조 9천억 원, 차남 재산은 2조 1천억 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재산 아닙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와 같은 천문학적인 재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재산을 갖고서도 아버지의 재산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원수처럼 싸운 것이었죠.
그 결과 아버지를 포함해 다섯 가족이 한날한시에 법정에 서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깨달음)그만큼 그들은 그 많은 돈을 지켜보려 하다가 가족의 생명을 서로 찔러 해치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천문학적인 돈이 있었나 봤으면 좋겠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자족하며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돈이나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주님께서 재림하셔도, 이 땅에 미련 없이 주님의 품에 안기 수 있기 때문이죠.
(적용)그래서 우리는 잠언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를 깊이 고백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돼야 하죠.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내기도)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 인생의 목적을 돈으로 삼고 살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돈이 없어는 안 되지만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면 그것이 유라굴로 광풍으로 제 인생을 덮쳐 죽음으로 몰고간다는 것을 늘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오직 돈과 재물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아무리 이 세상이 돈 때문에 유라굴로 광풍처럼 미쳐간다해도 저희들은 바울처럼 주님의 사명을 따라 살게 하시옵소서.”
(찬양)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자라나는 나무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귀한 재목 되겠어요 오 하나님 이 재목 바쳐 주의 재단 쌓으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도 실은 거대한 알렉산드리아 배에 승선한 선장과 선주와 선원들과 같은 모습 아닙니까?
모두가 자기 물건을 팔아 더 많은 부와 재물을 축적하면서 살려는 모습들 말입니다.
그것이 어디 나쁜 일입니까?
오히려 그것이 가족의 생계와 자식들을 돌보고 노후를 내다보는 지혜로운 삶이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은 인생의 목적 자체를 어디에 두고 사는가 하는 것이죠.
롯처럼 주님과 교제하는 자리를 떠나 더 많은 풍요와 번영만을 목적으로 하는 인생은 결국 소돔과 고모라 땅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알렉산드리아 배를 통해 더 많은 재물과 부를 축적하려는 이들은 유라굴로 광풍속에서 자신들이 취한 것들을 다 내던져야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인생의 목적으로 다시금 분명히 하고, 바울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건지는 사명선을 타고 가는 한 해 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도 생명을 건져올리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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