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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이사야 41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20절까지는 미래의 두려움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유다 백성들이 지금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을지라도 그 바벨론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고,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의 주관자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열방이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대신에 그런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그들에게 새로운 은총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1-29절 마지막절까지는 역사의 창조주이시고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처럼 아무리 우상을 섬기는 족속들이 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는 것같지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결국은 헛것이요 그 나라도 패망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을 바르게 세우신 다음에는 분명코 한 사람을 세워서 유다 민족을 고국으로 돌려보내실 것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창조주 곧 섭리자는 하나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패망했고, 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에게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계속해서 메시지를 선포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자, 이방 나라들을 들어서 유다 백성들을 치셨는데, 그래도 끝내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자, 바벨론 제국을 들어 그 나라를 무너뜨렸고, 그들을 포로로 끌고 가게 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사야 39장을 통해 히스기야에게 말씀한 바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때에라도, 그리고 그 후손들의 시대라도,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바르게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드는 것은 그래도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을 때이지 않습니가? 그러나 그 소망과 희망의 때가 지나면 결코 매를 들 수가 없죠. 왜냐하면 매를 들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무 가지가 부드러울 때는 철사를 매고 꺾어서 바로 세울 수 있지만, 그 나무 가지가 완전히 굳어져버리면 도저히 바로 세울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바로 그런 상황이셨습니다.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그래도 희망과 소망을 품고 계셨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듣지 않자, 이제는 바벨론 제국을 들어 그들을 징치하신 것이고, 포로로 끌려가 고통 중에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심은 유다 백성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완전히 멸망하고 이 땅에서 사라지길 원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다시금 일어서길 바라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유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무엇을 놓쳐 버린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린 걸 그들은 땅을 치고 후회하며, 탄식하며,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 입장입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그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해 내셨고, 가나안 땅을 주셔서 풍족하게 살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어 버린채 그들이 잘 나서 된 것마냥 착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일컬어 본문 1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이른바 이스라엘 백성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하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나는 버러지다’ 곧 ‘벌레와 같은 존재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자이다, 하고 살았다면,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마치 능력이 있고, 힘이 있어서 떵떵거리며 산 것 마냥 착각하며 우상의 세계에 빠져있을 때 그런 포로생활을 겪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런 ‘버러지’ 곧 ‘벌레’라는 말이 나쁘게만 들리는데, 실은 그것이 만나와 연결된 단어입니다. 이른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 나와 광야를 걸을 때, 하나님께 먹을 게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빈 하늘에서 만나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루의 정량만 거두도록 했고, 6일째는 그 이틀째 것 까지, 곧 7일째 안식일 것까지 거둬들이도록 했죠. 그런데 하루의 정량 이상을 거둔 자, 또 6일째 되는 날 더 엄청난 것들을 거둬들인 자들은 그 만나가 먹을 수 없는 벌레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16장 20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더 많이 거두고, 더 많은 것을 채워놓고 쌓아두려고 하자, 그것이 벌레가 생겼다고 하죠. 바로 그것이 ‘버러지’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삶을 망각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삶을 잊어버리면, 그 자체의 삶이 버러지, 곧 벌레 같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채 살아가는 자들, 자기 배만 불리기 위해 쌓고 또 쌓아가는 자들, 그러면서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쾌락과 욕망의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살아 있고 많이 가졌을지라도 실은 ‘버러지 인생’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버러지 인생속에 처한 유다 백성들을 내 버려두십니까? 아니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을 향해 본문 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함께 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의로운 당신의 손으로 도와 줄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만큼 그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고통의 때가 지나면 분명코 그들을 회복케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런 일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창조주요, 섭리자요, 이 세계 역사를 주관하는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21-29까지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25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 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그를 통해 유다 백성들을 포로에서 귀환토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과연 그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페르시아의 대왕 ‘고레스’를 일컫는 것입니다. 물론 고레스 대왕은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닙니다. 이방 왕이고, 이방 나라의 우상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다시 말해 유다 백성들이 지금 바벨론 제국의 압제를 받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런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 속에 있는 유다 백성들을 다시금 고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도구로 고레스 대왕을 사용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왜 그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바로 천지의 주관자시고, 모든 우상이 헛것임을 만 천하에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상천하지에 참된 신이시고, 하나님만이 모든 우상을 무너뜨리게 하시는 영원하신 구세주이심을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보여주기 위함 말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바벨론에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포로생활을 발버둥치고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신들의 모습, 이전의 버러지 같던 그 욕심을 추구한 모습들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죠. 그래야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들에게 자유와 회복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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