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25장과 26장은 빌닷과 욥의 세 번째 논쟁입니다. 둘 사이의 첫 번째 논쟁은 8~10장에 담겨 있고, 두 번째 논쟁은 18~19장에 담겨 있습니다. 큰 틀에서 보자면 빌닷의 논지는 엘리바스와 전혀 다르지 않았죠. 욥이 고통당한 것은 죄악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과응보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셨기에 욥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그의 견해는 엘리바스나 소발과 전혀 차이가 없었죠.
그래서 어제도 읽은 바 있지만, 욥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견해에 자기 의로움을 항변했죠. 만약 하나님을 자신이 만난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고, 언젠가는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무죄함을 인정하실 것이라고 욥이 항변했습니다.
그런 욥의 항변을 듣고 있던 빌닷이 더는 참지 못하고 욥에게 세 번째에 이르는 논쟁에 나서고 있는 형국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의 25장에서 빌닷이 세 번째로 욥에게 논쟁하고 있는데, 그의 논쟁은 길지 않습니다. 과연 빌닷이 뭐라고 욥에게 대항하고 있습니까? 본문 2절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빌닷은 하나님께서 영광과 위엄을 지니신 분이시고, 그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으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며, 하늘을 질서 정연하게 만드셔서 화평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수많은 천군 천사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 정연한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빛은 이 세상 어떤 빛의 존재들보다도 뛰어나기 때문에 결코 인간은 자기 의로움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5~6절에서는 이렇게 자기 견해를 밝힙니다.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구더기와 벌레 같은 인간의 일생은 하나님 앞에 결코 깨끗하거나 무죄를 주장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빌닷이 욥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욥이 아무리 자기 무죄와 의로움을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빌닷의 세 번째 주장은 자기 자신의 견해라기보다는, 이미 앞에서 엘리바스가 이야기했던 논점을 재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그의 이야기들을 끝까지 듣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의 말을 잘라버리듯이, 그의 주장은 6절에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26장으로 넘어가서 욥이 자기 논지를 펼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욥은 빌닷의 주장을 비꼬는 듯한 말을 먼저 이어나갑니다. 26장 2~4절입니다.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 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왜 욥이 이렇게 비꼬는 투로 빌닷에게 대구하는 것입니까? 실은 빌닷이 펼치는 주장이 욥에게 위로나 도움을 주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마치 빌닷이 큰 지식이 있는 자처럼 욥을 가르치려고 하지만, 실상은 빌닷의 지식이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짜 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5절부터 서서히 빌닷의 모순된 주장을 우회적으로 공박해 나갑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그에 비해 인간은 벌레와 같다고 네가 말했는데, 그러면서 네가 나를 그렇게 무시하고 있는데, 왜 너는 마치 하나님처럼 나를 판단하려 드느냐,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욥은 26장 5~10절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무슨 내용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피조물도 자랑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날 뿐이요, 악인은 다 심판과 함께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왜 욥이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입니까? 빌닷이 자신을 향해 너는 구더기와 같은 존재, 벌레 같은 인생이지 않느냐, 하고 말했죠. 그런데 실은 나처럼 너도 도진개진이지 않느냐, 하는 차원에서 욥이 이야기하는 것이죠. 나만 벌레 같은 존재, 구더기 같은 인생이 아니라, 너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를 이처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14절 마지막절에서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하고 말하는 것이죠.
우리는 빌닷이 욥에게 한 이야기나, 욥이 자기주장을 우회적으로 펼치고 있는 논지가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벌레와 같기 때문이죠. 이사야 41장 14절도 그렇습니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시편 22편 6절도 그렇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하고 고백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2장 23절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헤롯의 인생이 결국 벌레에 먹혀 죽게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인간의 실상이 때로는 버러지보다 못한 인생으로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빌닷의 주장이나 욥의 주장이 틀린 게 아니죠. 하지만 욥을 향해 쏘아붙이듯, 하나님의 심판자로서 욥을 공박하는 빌닷이 놓친 게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벌레와 같고, 때로는 버러지보다 못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통해 당신의 주권사역을 펼쳐나간다는 것이죠. 빌닷은 그걸 놓친 채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올려놓고 욥을 비판하고 정죄한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주관자요 통치권자이지만, 그러나 버러지 같은 인간을 세심하게 사랑하시는 분이란 사실이죠. 욥의 깊은 신음소리를 외면치 않듯이, 우리의 깊은 신음소리도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시고 감싸주시는 분입니다. 열왕기하 6장과 7장 사이에 기록된 사건을 보면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북이스라엘과 아람 나라가 서로 대치국면이고, 전쟁의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6장 초반부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이적을 베푼 내용이 나옵니다. 그 이적이 무엇입니까? 선지자 학교의 생도들 곧 요즘 용어로 말하면 신학생들이 신학교를 짓기 위해 나무를 베는데 그만 도끼가 물에 빠져버리죠. 그때 한 신학생이 실망과 좌절에 빠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사 선지자로 하여금 이적을 베풀어 그 도끼를 건져 올려줍니다.
사소하게 보이는 그 사건을, 국가 간의 전쟁이 일어난 중대한 사건 속에 왜 하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계와 역사를 주관하시고 국가적인 중요한 사건도 개입하시만 동시에 한 개인의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깊은 관심갖고 돌보시는 분이심을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우주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분이면서도, 동시에 버러지 같은 인생인 나를 위해서도 세세하게 관심을 갖고 품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양인 우리의 목자시고, 친히 양의 문이 되어 나를 지켜 주시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 안에 있으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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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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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인생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때론 하나님의 크고 광대하심과 역사의 주관자 되심을 이해하면서도, 우리 인생사에 깊이 개입하셔서, 우리의 사소한 것까지 돌보시는 주님이심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저희의 목자 되시고 양의 문이 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지키시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모든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해 가시는 주님의 강한 붙드심을 경험하는 하루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