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렘17:5-9)_2025년 6월 8일 성령강림주일 설교 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렘17:5-9)_2025년 6월 8일 성령강림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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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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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신 장면이 나옵니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나병 곧 문둥병 걸린 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멀리서부터 소리를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말이죠.

그것은 자신들을 고쳐달라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선포했습니다.

“이제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들의 몸을 깨끗케 되었음을 보여라”하고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는 동안 그들 모두가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자신들의 몸을 고쳐주신 주님께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게 마땅한 일 아닙니까?

하지만 그들 10명 중에 오직 한 명만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감사의 인사를 할 뿐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개나 돼지처럼 짐승취급하던 그런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누가복음 17장 17-19절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17:17-19)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말씀입니까?

문둥병 곧 한센병은 당시 유대 사회의 저주받은 질병으로 동네에 함께 살 수 없었고 동네 바깥에서 홀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고 누구와도 섞여 살 수 없는 사망선고를 받은 삶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깨끗이 고쳐주셨다면 실은 모두가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일평생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모시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10명 중에 오직 한 사람만 주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나머지 9명은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겠다는 것이요 이전처럼 자신들이 생명의 주관자로 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적용)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예전에 그 목사님이 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 당시에 그 목사님이 기도를 하면 주님께서 누구든지 질병을 고쳐주시는 역사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때도 어느 교회 성도님이 도무지 의술로도 못 고칠 질병을 주님께서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십일조와 감사생활도 잘 하는 가 싶었지만 한 해 두 해 시간이 가면서 주님과는 거리가 멀어진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왜죠?

그 전까지는 도무지 살 가망이 없는데 주님께서 고쳐주셨으니 너무나도 감사해서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면서 자기 생명을 내어 맡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살만하다 보니까 주님을 위한 생명도, 주님을 위한 시간도, 주님을 위한 물질도 아쉽게 보여서 결국은 주님을 떠나고 만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녀를 가만히 놔둘리 없었고 결국은 이전보다 더 극심한 질병 가운데 불러 그의 영혼만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일평생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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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예레미야’(יִרְמְיָה)란 이름은 ‘주님께서 들어올리신다’는 뜻입니다.

바벨론에 패망한 유다 백성이 다시금 세워질 수 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인데, 아버지 힐기야는 엘리 제사장(삼상14:3)의 후손인 아비아달의 자손입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삼고자 할 때 그 솔로몬을 제치고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걸 도운 인물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왕이 됐을 때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직에서 파하고 아나돗 땅에서 살게 했습니다.

 

어찌보면 예레미야는 몰락한 대제사장 가문의 후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후에는 왕궁 사람들과 가깝게 지낼 수가 없었겠죠.

그런데 남왕국 유다의 16번째 요시야가 8살에 왕이 되어 통치 28년에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 그때 성전을 수리할 때 율법책을 발견한 인물이 예레미야의 아버지 힐기야였습니다.

 

그때가 B.C.627년으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선지자로 사역한 때요 그의 나이 16살 근 20살 때의 일이었죠.

그런데 그토록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던 요시야 왕이 말년에 교만한 채 애굽의 파라오와 므깃도 전투를 벌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섬기고 있으니 애굽과 전투를 벌이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이길 거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투에서 그는 죽고 말았는데, 그때가 B.C.609년의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뒤였습니다.

유다를 격파한 애굽의 파라오는 유다 왕을 자기 멋대로 세우고자 했는데 여호야김을 제18대 왕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니 여호야김은 친애굽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B.C.605년 바벨론 제국이 애굽과 갈그미쉬 전투를 벌였는데 그때 애굽이 패하고 말죠.

그 일로 인해 친애굽정책을 펼치고 있던 여호야김은 힘을 잃게 되죠.

그때 다니엘을 비롯한 많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데 제1차 바벨론 포로유수로 B.C.605년의 일이었죠.

 

그 무렵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바벨론에 의해 환란을 당하게 된다는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했습니다(렘36장).

하지만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여호야김 왕은 그 책을 불러 태워버립니다.

그리고는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도 없던 일로 여기고 바벨론 제국에게 반역을 꾀하죠.

그걸 알아차린 바벨론 왕은 여호야김 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여호야긴을 제19대 왕으로 앉히죠.

그런데 그 여호야긴도 여호야김처럼 반역을 꾀할지 몰라 왕으로 앉힌 뒤 3개월만에 바벨론으로 끌고 가버립니다.

그때 많은 유다 백성들이 함께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 일이 제2차 바벨론 포로유수기로 B.C.597년의 일이죠.

 

이제 바벨론 제국은 시드기야를 제20대 왕으로 세우는데 그들의 꼭두각시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드기야조차 바벨론 제국보다 애굽의 파라오를 의지했고 급기야 B.C.586년 바벨론이 마지막으로 쳐들어와서 유다 왕국을 폐허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무렵 예레미야는 바벨론 제국에게 항복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선포를 합니다.

하지만 유다의 왕과 지도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레미야를 끌고(렘42-43장) 애굽으로 도망칩니다.

그때 그들은 무장한 바벨론 군사들에게 곧장 붙잡히고 마지막으로 포로로 끌려갔는데 B.C.581년의 일로 제3차 포로유수기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 직전까지 근 40년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사역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깨달음)이게 그 당시에 급변하는 국제정세였습니다.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하며 탐욕에 물든 삶을 살았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애굽의 파라오를 신처럼 떠받들며 의지했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약탈하고 지배한느 애굽의 방식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러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 팽개친 채 오직 자신들의 욕심과 탐욕만을 좇아 살 뿐이었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심령을 흔들어 깨우고자 예레미야를 불러 바벨론 제국에게 징계를 받기 전에 회개하도록 촉구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왕과 방백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돌아서지 않았고 오히려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고 두루마리 성경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왕과 지도자들이 애굽의 파라오를 신처럼 떠받들다가 바벨론 군대에게 붙잡히는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폐허로 변할 예루살렘 성읍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이유(렘9:1)입니다.

 

사실 우리가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는 불타 없어진 두루마리인데 바룩의 도움으로 복원한 것으로 보죠.(렘36:17-18, 렘45장 초반부).

그래서 예레미야 1장은 예레미야가 부름받은 소명장이고 2-25장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나옵니다.

26-29장은 어리석은 거짓 선지자들과 예레미야가 논쟁을 벌이고, 30-33장은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34-45장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둘러싼 사건들이 나오는데 그것이 예레미야의 전반부 말씀입니다.

후반부는 열국에 대한 예언의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46-49장까지는 애굽, 블레셋, 모압, 에돔, 다메섹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하죠.

50-51장은 바벨론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52장은 예레미야서의 결론로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이 강탈당하고 여호야긴 왕이 감옥에서 벗어날 것을 선포하며 끝을 맺고 있습니다.

 

(적용)그래서 지난 시간 살펴본 예레미야 17장은 예레미야의 전반부 말씀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이 왜 저주를 받는다고 선포했습니까?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람’이란 히브리어로 ‘아담’(אָדָם)인데 에덴동산의 아담을 말하기도 하지만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대의 아담은 애굽의 파라오를 믿고 의지하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나라들이 미국을 의지하는 것처럼 그 당시에 남왕국 유다도 애굽의 파라오를 신처럼 떠받들며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유다 민족을 향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애굽의 파라오가 전 세계를 주도하는 강력한 왕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코끝의 호흡이 멈춰서는 순간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다 왕과 지도자들은 그 애굽의 파라오를 맹신하며 신처럼 떠받들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저주를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는 뜻(시146:3-5)입니다.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그 분이 너를 지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잠3:5-7)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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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도 같은 맥락 속에 있는 말씀인데 본문 6절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원해)여기에 우리말 ‘떨기나무’로 번역된 히브리어 ‘예르아르’(עֲרוֹעֵר)는 ‘벌거벗다’는 ‘아레르’(עָרַר)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검불과 같은 걸 말합니다.

황무지와 불탄 폐허(사23:13,렘51:58,행15:16)를 뜻하기도 하죠.

 

사실 ‘떨기나무’는 히브리어로 ‘스네’(סְנֶה,출3:2)입니다.

‘가시 씨앗’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작고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식물은 사람들이 피하려고 방향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깨달음)지금으로부터 3,500여 년 전 호렙산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곳이 떨기나무 불꽃이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양을 치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형국이었죠.

그때 떨기나무를 보려고 가까이 나아가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시면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도록 부르셨죠.

 

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떨기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마른 검불처럼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벌거숭이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세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미디안 땅에서 빈털터리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던 모세의 모습도 떨기나무와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셨으니 그들은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을까요?

애굽에서는 떨기나무처럼 앙상한 가지밖에 없던 그들의 삶이 가나안 땅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모세가 고별설교할 때 그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오직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준행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 그들이었습니다.

 

그것이 B.C.1500년 경의 모습이었는데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B.C.627년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그 시대에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만 것입니다.

오직 눈에 보이던 국제정세만 바라본 채 세상의 패권을 쥐고 있는 절대강자 애굽의 파라오를 신처럼 떠받들고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 애굽의 왕 파라오에게 유다 백성들조차 신성을 부여해 떠받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유다 백성들, 그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술을 통해 그들이 사막의 떨기나무가 될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그 옛날 애굽에서 벌거숭이처럼 노예로 전락하듯이, 가시 씨앗처럼 누구도 함께 하기를 꺼려하는 것처럼, 그들이 사막 한 복판에 버려진 백성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직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직전에 주어진 말씀이었으니 그때라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나아갔다면 다시금 사람이 살만한 땅으로 세워주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끝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지 않았고 끝까지 애굽의 파라오만 붙잡다가 떨기나무처럼 버려진 것이었습니다.

 

(적용)그렇기에 이 말씀 앞에 우리가 돌아봐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은혜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 기업을 누리게 되었다면 더욱 겸손히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채 세상 사람을 신처럼 떠받들고 맹신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징계 가운데 몰아세우신다는 것이죠.

그런 떨기나무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더욱더 겸손한 마음으로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는 길 뿐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청청하도록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자책]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예스24

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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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사막의 떨기나무로 전락하지 않는 긍휼의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열 명의 문둥병자를 주님께서 고쳐줬는데도 오직 한 사람만 주님께 나와 감사의 고백을 하지 않았더냐?”

나머지 9명은 문둥병을 고쳐주신 주님을 생명의 주관자로 모시기보다 자신들이 주관자가 되어 살겠다는 뜻이지 않더냐?”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었다면 일평생 그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온전히 자기 생명의 주관자로 모시는 자들을 기뻐하시지 않겠느냐?”

애굽에 벌거숭이처럼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의 은혜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된 것 아니었더냐?”

하지만 세월이 흘러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그 시대에 하나님의 은덕을 입은 그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애굽의 파라오를 신처럼떠받들며 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한탄하셨겠느냐?”

그런 그들이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벌거숭이 검불처럼 바벨론에 패망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죄악을 위해 주님께서 십자자가 못 박혀 죽어주신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노라 다짐하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질병의 수렁에 빠져 있던 너를 주님께서 고쳐주셨을 때 그 은혜를 일평생 기억하면서 오직 주님을 생명의 주관자로 흔들림 없이 모시고 사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느냐?”

경제적인 수렁에 빠져 있던 너를 주님께서 회복케 해 주셨을 때 그 은총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겸손하게 살아갈 때 그런 너를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믿음이 좋은 것 마냥, 네가 능력이 있는 것마냥, 네 힘과 네 명철을 좇아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의 것들을 신처럼 떠받들고 산다면 너도 떨기나무처럼 하나님께서 징계가운데 내 몰지 않겠느냐?”

목사님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은혜를 체엄한 그 성도가 하나님의 품을 떠났을 때 죽을 병으로 그의 영혼만은 건져주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네 생명의 주관자로 모시는 걸 기뻐하시지 않겠느냐?”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예화)우리가 알고 있는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로 부른 12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 중 하나였죠.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를 특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돈 궤 곧 재정 총무를 맡기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곳간도, 기업의 재무도, 회사의 재정도, 모두 신뢰할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듯 말이죠.

 

그런데 제자들의 살림살이를 책임져야 할 가롯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배신자의 아이콘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왜죠?

신약성경의 어디를 봐도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향해 ‘나의 구주,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이 한 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가롯 유다는 예수님과 1대 1일의 인격적인 주님의 관계를 맺지 못한 채 그냥 주님의 제자로 따라다닌 격이었습니다.

 

(깨달음)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크리스천으로 보이는 신앙인들 중에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은 언제든지 주님을 떠나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일평생에 한 번이라도 주님을 자기 생명의 주관자로 모신 사람들은 결코 주님을 배반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했을지라도 베드로가 다시금 주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주님과 일대일의 생명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26)하고 대답했었죠.

 

그런 베드로였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참된 생명의 사도로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롯 유다는 주님과 일대일의 생명의 관계가 없었기에 끝내 떨기나무처럼 사막에 버려진 채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요. 주님. 저도 주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모시는 11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놓치지 않고 살게 해 주세요.”

가롯 유다가 아무리 주님의 신뢰를 받았어도 그는 주님을 향해 생명의 주관자로 모시지 않았네요.”

베드로는 연약하기 짝이 없어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했어도 주님과 일대일의 생명의 관계를 맺었기에 그가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회복될 수 있었어요.”

저도 일평생 주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치유의 주님으로, 회복의 주님으로, 영생의 주관자로 모시게 하셔서 어떤 경우에도 떨기나무처러 사막에 버려지는 일이 없게 해 주세요.”

"그 삶이 성령님 안에 거하는 삶인 줄 믿어요."

 

(찬양)언제나 내 모습 너무나 부끄러워

무릎으로 주님께 기도로 가오니

나 홀로 서 있는 죽은 내 영 깨우사

주님만 나를 세워 내 영 살게 하소서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내 안에 계시고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나를 세워 주소서

 

 

[전자책]야긴과 보아스 - 예스24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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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이들, 하나님을 생명의 주관자로 모신 이들은, 일평생 배반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1대 1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자들은 결코 주님을 떠나 살 수가 없습니다.

애굽에서 떨기나무처럼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심어주신 그 은혜를 망각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 징계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문둥병에 고침 받은 10명 중에 오직 한 사람만 주님께 감사의 인사를 한 것은 주님만을 생명의 주관자로 모시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나머지 9명은 다들 자신이 자기 생명의 주관자로 살겠다는 뜻인데 그렇게 사는 자들은 결국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가롯 유다처럼 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오직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과 생명의 관계를 놓치지 않는 생명나무처럼 청청한 은혜 속에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성령님 안에 거하는 삶이요 모두가 그런 은총 속에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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