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28:1-6)_2025년 4월 27일 부활후첫번째주일설교 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28:1-6)_2025년 4월 27일 부활후첫번째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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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처음 듣는 한자 싯구입니다.

제가 웬만해서는 안 쓰는데 꼭 한 번 써 보고 싶은 싯구입니다.

그 뜻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아주 멋진 말인데 이 시는 서산대사(1520∼1604)의 ‘답설야(踏雪野)’에 나오는 말입니다.

서선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이고 법명은 휴정(休靜)인데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의 스승이기도 하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묘향산에 머물던 서산대사에게 서신을 보내 나라의 위기를 알립니다.

그 서신을 받은 서산대사는 전국의 사찰과 승려들에게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격문을 보내죠.

그러자 도처에서 의승병(義僧兵)들이 일어났고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우죠.

그때 서산대사가 73세였다고 하는데 나라의 어른으로서 나라가 어려울 때 보여준 참된 표상이었다고 평가를 받죠.

 

서산대사의 답설야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백범 김구 선생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공주 마곡사에 은신하던 때에 서산대사의 그 답설야를 알게 됐다고 하죠.

그 후에 나라를 위해 일하고 어려운 고비를 맞이할 때마다 그 시구를 마음에 되새기며 살았다고 하죠.

그러니 그 후대의 많은 사람들도 그 시구를 가슴에 새기며 큰 좌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엊그제 새벽에 빌레몬서를 살펴봤는데 그 편지는 A.D.60년경 가택연금상태에서 써 보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는 다른 편지입니다.

다른 3개의 편지는 각각 교회를 향해 쓴 거지만 빌레몬서는 골로새교회의 창립맴버이자 오네시모라는 종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쓴 편지죠.

바울이 왜 빌레몬이라는 한 개인에게 그 편지를 보냈겠습니까?

그 빌레몬의 집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주인의 돈을 훔쳐 달아났다가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숨어들어왔다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신에게 좋은 동역자임을 알았지만 주인의 부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뜻을 갖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은 경우에는 하나님께 죄를 고백할 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 20%를 더해 변상하도록 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원천적으로 그런 일을 차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담긴 율법이었죠.

그런데 자의반 타의반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세리장 삭개오도 있었는데 그도 주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재산을 절반이나 내 놓겠다고 고백을 했죠.

바울도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을 찾아가 그렇게 변제하면 좋겠지만 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이죠.

“빌레몬아. 내 곁에 너의 종인 오네시모가 있는데 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나의 동역자가 됐다.”

“하지만 그가 너의 돈을 훔쳐 달아난 이상 이것을 해결해야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고 너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해주지 않겠느냐?”

“다만 그에게는 수중에 돈이 없으니 정말로 네가 그 돈을 받고 싶으면 내 앞으로 달아놓도록 해라.”

“그러나 너도 나에게 영적으로 진 빚이 있지 않느냐?”

“이제 내가 가기 전에 너에게 먼저 오네시모를 보내는 것이지 그를 잘 부탁한다.”

 

그렇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 편지를 써 보낸 뜻이 무엇입니까?

오네시모가 그 돈을 꼭 변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형편이 못돼 너에게 죄를 사죄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것이 나를 봐서 용서해줘라, 하는 뜻이죠.

 

중요한 것은 그 편지를 한 개인에게 보내는데도 불구하고 골로새교회 성도들이 함께 보도록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1:1-2)

 

바울은 빌레몬서를 써 보내면서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이 자기 종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좌표를 보여준다면 모든 성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그런 모습이야말로 눈 덮인 들판을 걷는데 뒷 사람들에게 참된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것 말입니다.

 

(적용)우리도 마찬가지죠.

내가 서산대사나 김구 선생처럼 또 바울이나 빌레몬처럼 살지 못한다 해도 내가 머문 자리는 누군가에게 믿음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바울의 일생과 편지 | 바울은 누가 뭐래도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것은 그의 곁에 위대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 디도, 실라, 디모데, 누가, 루디아, 야손,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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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예수님께서는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금요일 오후 3시 무렵에 숨을 거두셨고 그날 해가 질 무렵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동굴 무덤에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안식후 첫날 곧 주일날 새벽 미명에 시체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부활이란 단어에 대해 위키 사전에서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활동이 완전히 정지된 생명체가 소생하여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하고 말이죠.

 

그런데 생명체가 죽어서 다시 소생하는 일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예배당 계단에 심어 놓은 그 꽃나무도 겨울철에는 완전히 죽었다가 봄철만 되면 새 싹이 다시 올라옵니다.

그 나무가 너무 많고 또 지저분하다고 여긴 어떤 어른이 테이블야자로 분갈이를 해 줘서 사시사철 푸를 수 있다고 합니다.

죽어 있는 듯한 나무에서 그렇게 새싹이 올라오는 것은 그 나무가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다르죠.

예수님은 완전히 숨을 거두셨고, 시체 상태로 동물 무덤에 안치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뜻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시스(άνάστασις)’란 단어를 2천 년 전 사용했지만 두 가지 경우에 사용했죠.

하나는 전혀 부활이 없다고 할 때 그 단어를 썼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인 이야기로 부활을 언급할 때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이었죠.

그만큼 2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금 살아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시체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까닭에 제자들은 ‘다시 살아나셨다’는 헬라어 ‘아나스타시스’라는 단어 대신에 ‘일어나다’(arise)는 ‘에게이로’(έγείρω)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아나스타시스라는 단어를 써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한다면 다들 거짓말 하는 걸로 여길 것이 뻔하기에 ‘일어나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의 한 복판에서, 시체가 된 그 상태로서, 다시금 생명으로 살아나 일어나셨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왜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까?

왜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끝이라고 하다면 주일날 시간을 내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이 모든 일이 헛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부활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죽음 너머에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영생의 몸으로 부활할 것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죠.

 

(적용)그래도 부활을 못 믿겠습니까?

부활의 증거가 있습니다.

자연계의 피조물 가운데 모든 씨앗과 그 씨앗이 싹이 나고 잎이 피고 대가 올라오는 모습이 부활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나팔꽃 씨는 작고 볼품 없지만 그것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땅에 떨어져 껍질을 벗고 싹이 오르고 그 싹이 이파리가 되고 그로부터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 나팔꽃이 피어오르는 것이죠.

작은 씨앗 하나가 완전히 새로운 형체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은 비단 나팔꽃 씨앗만 그런 게 아니라 많은 씨앗들이 그런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과 같은 형태입니다.

육신을 지닌 우리의 몸도 죽으면 화장이 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아담의 몸처럼 온전한 모습으로 새롭게 부활할 것입니다.

 

그래도 부활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세 가지 차원의 부활의 증거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그 종교의 창시자에 관한 무덤이 존재합니다.

그 종교가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그 무덤은 더 높은 봉분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무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 첫 번째 부활의 증거입니다.

 

두 번째 부활의 증거는 제자들이 ‘에게이로’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시체 가운데 있던 주님의 죽음의 한복판에서 부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만약 그 증언이 서로 짜맞춘 것이거나 공모해서 한 말이라고 한다면 금방 거짓으로 탄로나고 말 것입니다.

만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 때 그 똑똑한 법률 자문단이 거짓으로 짜 맞춘 그 말이 다 드러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도 계엄을 통해 다 잡아들이라는 말을 했다는데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었기에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 아닙니까?

막달라 마리아와 많은 마리아들 그리고 제자들이 목격한 예수님의 부활 증거는 결코 거짓말로 짜 맞춘 게 아니라 진실이었기에 거짓으로 탄로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부활의 증거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통해 일깨워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5-8)

 

부활하신 주님께서 맨 먼저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12제자에게, 또 500여 형제들에게, 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물론이고 다메섹 도상에 길을 가던 바울에게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때 그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후로도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부활하심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나타나시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에도 지나가는 말로 말씀을 드렸지만 개그맨 박성호가 어느날 개인적인 힘든 일로 며칠 동안 밤에 잠을 못 잤다고 하죠.

그리고 자기 아들을 학원에다 데려다 주려고 집 앞 엘리베이터 7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그 엘리베이터 안이 천국으로 완전히 바뀌면서 그런 마음의 평안함을 느끼게 했다는 것입니다

“너는 어차피 네가 죽으면 갈 곳이 있으니 마음을 평안하게 가져라”하고 말이죠.

그러면서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아들도 같이 천국에 있는 모습을 보게 해 주셨다는 것이죠.

 

이런 모습은 박성호뿐만 아니라 수 많은 연예인들도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셔서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죄와 사망의 무덤문을 열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으십니까?

여러분들은 시체가운데 있던 주님께서 다시 생명으로 부활하심을 믿으십니까?

이 사실이 아직까지 믿어지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도하면서 ‘주님 나에게도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여주세요’하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자녀들에게 친히 역사하셔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 권성권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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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은 6절 하반절 말씀을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원해)주일 새벽 미명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지진을 일으켰고 동굴 무덤을 활짝 열어 제쳤습니다.

그때 그 무덤 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완전히 초죽음이 된 상태였죠.

그때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 있지 않고 당신이 말씀하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하고 말이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와서 그분이 누우셨던 곳을 보라’하고 말하죠.

 

우리말 ‘눕다’(lie)는 헬라어 ‘케이마이’(κεῖμαι)는 ‘놓다’(set)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마3:10)고 할 때 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아기 예수로 탄생할 때 그아이를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이다’(눅2:12) 할 때도 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단어로는 ‘쉼’(שִׂים)이란 단어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에덴에 동산을 만들고 그곳에 아담과 하와를 둘 때(창2:8) 바로 그 단어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깨달음)물론 ‘케이마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뭔가를 놓거나 두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뭔가 의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도록 전시하는 걸 말합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고하듯 말이죠.

나무뿌리에 ‘놓인’ 도끼(마3:10)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놔둔 도끼는 벌목꾼이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우연히 떨어뜨린 게 아니라 나무를 베려고 세워 둔 것입니다.

언덕에 ‘놓인’ 성읍(마5:14)도 시골에 있는 마을을 보여주고자 한 게 아니라 왕이 영토를 확보하고자 군대를 파견한 요새임을 알게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시체로 누운 ‘그 자리’도 단순한 무덤의 자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그 자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의 표상이자 표적으로 보여주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른바 주님을 믿는 모든 자녀들이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극적인 부활을 이루게 될 것을 알게 하는 표적과 같은 자리인 것입니다.

 

(적용)에덴에 울타리를 두른 동산을 만들고 거기에 사람을 두신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두신 것은 모든 인류의 표상으로 삼도록 하신 것입니다.

너희에게 주어진 세상의 삶을 그저 그렇게 살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처럼 세상과 구별된 믿음의 울타리를 두르고 살라는 표징으로 말이죠.

그렇게 구별된 믿음의 삶을 살 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우아한 기쁨, 영적인 기쁨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다는 이정표로 삼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그 에덴동산의 삶을 에덴이 아닌 아단으로 곧 모든 삶의 초점을 자기 만족에게만 맞출 때 우아한 영적 기쁨이 아니라 주색잡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의 삶을 에덴동산처럼 살지 않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와 이생의 자랑거리만 좇아 살면 술과 마약과 여인의 치마폭에 빠져 사는 주색잡기와 다를 다 없는 삶이라는 거죠.

바로 그와 같은 삶을 구별하여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 우아한 기쁨이자 영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을 오고 오는 모든 세대가 인생의 좌표로 삼도록, 믿음의 이정표로 삼도록 에덴에 동산을 만들고 아담과 하와를 그곳에두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무덤에 있지 않다는 것, 그분이 누우셨던 무덤을 와서 보라는 것도, 단순히 와서 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부활한 무덤의 자리는 앞으로 너희가 죽은 후에도 주님과 똑같이 부활할 것을 내다보라는 좌표와 같은 자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분명코 죽게 될 것이지만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영생의 부활로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살라는 것 말입니다.

그를 위해 우리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부활의 첫 표증으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덤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죠.

 

그것은 마치 서산대사나 김구 선생이 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 후 세대가 그 길을 보고 따라오라는 삶의 좌표가 같은 모습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빌레몬으로 하여금 오네시모가 진 빚을 탕감해주고 용서해줄 때 다른 성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믿음의 좌표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누우셨던 그 자리는 우리 인생에 영원한 부활신앙을 잃지 않고 살게 하는 영생의 좌표와 같은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눈을 뜨면 볼 수 있어요 | 권성권

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들도 꿈을 꿀 수 없는 상태다.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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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부활신앙의 좌표 믿음의 좌표를 보여주는 은혜 안에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눈덮인 들판을 헤집고 나갈 때 처음은 어렵고 힘들지만 나중에는 그 길을 따라오는 자들에게 참된 이정표가 되지 않겠느냐?”

자기 돈을 훔쳐 달아난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품는다면 골로새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참된 믿음의 본이 되는 것이지 않겠느냐?”

개그맨 박성호가 아들과 함께 타고 가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천국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깨달았을 때 그 삶이 아들에게 믿음의 이정표가 되지 않겠느냐?”

천사가 동굴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그 자리를 와서 보라고 한 것도 단순히 구경하라고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주님께서 시체 가운데 누우셨던 그 자리에서 다시금 일어나 살아나셨듯이 너희들도 머잖아 죽을 때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좌표로 삼으라는 뜻이지 않느냐?”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 울타리를 친 동산에 두신 것도 세상과 구별된 믿음의 삶을 살 때 우아한 기쁨 영적인 기쁨을 누리는 이정표로 삼도록 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님께서 시체 가운데 누우셨던 그 자리를 들여다보라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주님께서 누우셨던 그 자리처럼 너도 머잖아 죽음을 맞이할 때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금 부활한다는 그 부활의 자표로 삼도록 한 것 아니더냐?”

그렇기에 오늘 네가 살아가는 세상의 삶이 에덴에 울타리를 친 우아한 기쁨 영적인 기쁨의 삶인지 아니면 이 세상 것에만 취해 사는 주색잡기의 삶인지 스스로 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간다면 서산대사나 김구 선생처럼 눈 덮인 들판에 온전한 믿음의 발자국을 남기는 영적 이정표가 되지 않겠느냐?”

빌레몬이 자기 돈을 훔친 오네시모를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처럼 너도 너에게 빚진 누군가를 용서하고 산다면 교회공동체에 믿음의 좌표가 되지 않겠느냐?”

너도 성도들 앞에서 입으로만 떠벌리는 어른이 되기보다 손과 발과 행동으로 부활 신앙을 보여주는 참된 믿음의 이정표가 되는 걸 주님이 원하지 않겠느냐?”

 

(찬양)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성경으로 문화읽기2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오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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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내년 8월 즈음에 서유럽 종교개혁지인 스위스 성지순례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그곳 스위스의 종교개혁자하면 떠 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장로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존 칼빈이죠.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장로교회를 창립했습니다.

그러자 칼빈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그곳에 장로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후 많은 지도자들이 칼빈의 영향을 받아 유럽 전역으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렇듯 칼빈은 살아생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크나큰 영적 교훈을 남긴 인물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죽을 때 남긴 유언은 지금도 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참된 좌표로 남아 있습니다.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 하는 게 그것입니다.

 

제네바시에서는 그의 뜻을 받들어 칼뱅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아쉬운 나머지 그의 무덤 위에 ‘J.C’라는 약자가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칼빈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하죠.

 

(적용)그와 같은 칼빈의 모습을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교회 성도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이 90세가 넘은 권사님 한 분이 죽을 날이 다가오자 수중에 있는 1억을 천만원씩 천만원씩 5명의 자녀들에게 나눠줬고 나머지 5천만원은 하나님께 드렸다는 간증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만큼 그 권사님은 그 교회 성도들에게 칼빈과 같은 또 다른 믿음의 좌표를 그려준 셈이었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주님. 나도 내 죽음을 맞이할 때 칼빈처럼 그 교회 권사님처럼 주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이 땅에 뭔가 업적을 남긴 묘비명을 세우려고 하기보다 칼빈처럼 아무 흔적 없이 주님 품에 안길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권사님처럼 주님 품에 안길 때 자식들에에게 일정부분만 넘겨주고 나머지는 주님께 드리고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 주님 품에 안기는 것이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자리의 좌표요 참된 부활신앙의 좌표인 줄 믿습니다.”

 

(찬양)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이슬 같은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사랑의 빛 잃어가면 주님 만날 수 없어 헛된 영화 바라보면 사랑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큰 물결이 뛰놀아도 주를 더 찬양하는가 큰 환난이 닥쳐와도 주를 더 찬양하는가

깊은 잠에 빠진 영혼 주님 만날 수 없어 근심 걱정 많은 자는 찬양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찬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언제 다시 주 오실지 아는 이가 있는가 신랑으로 오실 주님 맞을 준비 되었는가

기름 없는 등불 들면 주님 만날 수 없어 재림 나팔 소리 나면 예비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맞을 준비함이 금보다도 귀하다

 

 

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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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꿰뚫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누우셨던 그 자리를 들여다보도록 한 것은 단지 구경꾼으로 쳐다보라는 게 아니라 너희들도 죽음 이후의 부활신앙을 갖고 살라는 이정표를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걷는 믿음의 길이 내 자녀들과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이정표를 남기는 자리인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믿음의 좌표가 에덴의 좌표인지 아니면 아단 곧 세상의 쥐색잡기에 빠진 좌표인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머잖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고 영생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면 칼빈처럼 그 권사님처럼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믿음의 좌표를 남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 은총이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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