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오늘 본문도 어제의 시편처럼 표제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돼 있습니다. 어제 읽은 시편은 다윗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가면서 감사와 감격의 노래로 부른 시편이었습니다. 자신이 배다른 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8번째 아들로 외롭게 살고 있고, 또 촌뜨기로서 양치기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 놓인 자기 자신을 일약 왕으로 세워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요,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종으로 삼아주셨으니, 어찌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속에서 감사하며 감격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마음과 자세로 다윗이 성전에 올라가 감사의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은 물론이요 자신이 속한 나라를 위한 중보 기도자, 곧 섬김의 기도자로 살았던 그 삶을 노래한 시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실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그 표제인데, 어제 읽은 시편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것도 4절을 보면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이른바 이 구절은 읽으면 이 시편을 쓴 시인이나, 혹은 공동체가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 개인이든 공동체든, 그 현실은 영혼에 넘침이 될 만큼 조소와 멸시를 당하고 있다는 점이죠. 이것이 그 눈에 보이는 참혹한 현실입니다.
사실 이 땅에 현실은 가깝고 하나님은 멀게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현실에서 나와 가까이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내게 큰 영향을 미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은 내게 미약하고 뜸한 영향력을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실 속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조소나 멸시는 금세 나를 시궁창에 빠트리지만, 하나님의 위로는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말입니다.
이런 상황을 어디에서 엿볼 수 있겠습니까? 바로 히스기야를 비롯한 예루살렘 주민들이 앗수르의 산헤립 대군 18만 5천명에 휩쌓여 있을 때였죠. 그 날 밤 랍사게 장군이 예루살렘 성곽을 포위한 채 히스기야 왕에게 또 그 신하들과 예루살렘 성 안의 주민들에게 큰 소리로 멸시와 조롱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세상 어느 신도 우리 앗수르 제국을 맞선 신은 하나도 없었다, 너희들이 유일신으로 믿는 하나님도 우리 군대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히스기야 왕은 항복하거라, 하고 겁을 주고, 비난하고 멸시를 보냈었죠.
그때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주민들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움보다, 그들의 조롱과 멸시만 더 크게 들려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 선지가 격려하는 말,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그 말을 듣고, 히스기야가 그때 정신을 차리고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기 시작하죠.
그것이 어쩌면 오늘 본문 1-2절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하고 말입니다. 종은 히스기야를 비롯한 모든 예루살렘 주민들, 그 중에서도 남성들을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하고, 또 여종들은 예루살렘 성읍에 속한 모든 여성들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여종들이라고 낮춰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남종이든 여종이든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님께 향하는 마음과 자세를 갖춥니다. 저희들이 지금 앗수르에 포위돼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니, 하나님,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하고 기도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런 모습이 히스기야 시대의 예루살렘 주민들만 그렇겠습니까? 실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죠. 현실 속에서 어려움이 찾아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올라가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보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대처방안들을 찾는데 혈안이 되는 모습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도 안 될 경우에, 우리들이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 무릎꿇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하나님께서 세상의 방법들을 막으시는 경우가 있죠. 그래서 오직 그 문제의 해결자가 ‘나 여호와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어찌됐든 그때 히스기야,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히스기야, 그리고 히스기야와 함께 하나님께 매달리며 도움을 구하는 예루살렘 성읍의 온 백성들, 바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간구하던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랍사게 장군이 이끈 18만 5천명은 하루 저녁에 자중지란이 일어나 다들 죽고 말았습니다. 적의 칼인 줄 알고 쳤지만, 스스로 적군인 줄 알고 싸우다가 모두 전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헤립 대왕도 기가 꺾여 본국에 돌아갔을 때, 그 아들들이 이끄는 자객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고 말이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강냉이 전도를 할 때 어느 교회의 강냉이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의 사모님이 오셔서 트럭으로 그 강냉이를 싣고 가면서 제게 해 준 간증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이제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는데, 그 전에 구법을 적용받아 분할된 토지를 하나의 교회 땅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네 집사님이 민원을 제기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목사님이 돈을 쓰지 않고서는 그 땅이 교회 토지가 될 수 없다는 것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땅은 그렇게 애써도 토지변경이 안 됐는데, 교회 토지는 그렇게 쉽게 되니까, 문제제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 일이 술술 풀리니까, 주변의 목회자가 나서서 그 집사님 편을 들고, 시비를 걸어오고, 급기야 교회를 해산시키려고까지 했다는 것이죠. 심지어 그 목사님의 목도 짚어가면서 무시하고 비난했고, 그 사모님도 해코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그 당시의 지방회장과 지방회 어른들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주변 목회자들과 지방회장이 그 목사님과 사모님을 힘들게 하고, 해코지하고, 못살게 구는데도, 그 목사님과 사모님은 밤마다 ‘성전에 올라가 눈물로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몇 달 뒤에, 그 동네에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것입니다. ‘사모님, 그 목사님 죽어 버렸어요. 지금 차로 그 교회 장로님들이 목포로 싣고 나가고 있어요.’하고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사모님도 믿기지 않았는데, 그로부터 얼마 뒤에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대법원에서도 무죄로 드러났고, 그 목사님이 죽게 되자, 그 모든 이의제기들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싶습니다. 정말로 억울한 일을 겪어 법정에서까지 서야 되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의지하고 붙잡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 말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기보다는 더 큰 악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선으로 악을 갚으려고 하면 그 선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고, 그때 풀 수 없는 상황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들도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정확한 때에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방법으로 해결의 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1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심한 멸시와 조롱이 밀려올 때, 우리가 의지하고 간구해야 할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도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오늘도 어떤 상황을 맞이할지라도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간구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시125:1-5) (0) | 2022.08.13 |
---|---|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시124:1-8) (0) | 2022.08.12 |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시122:1-9) (0) | 2022.08.10 |
나의 도움이 어디서올까(시121:1-8) (0) | 2022.08.09 |
환란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시120:1-7) (0) | 2022.08.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