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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시편 119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본문 145절을 통해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자기가 진심으로 주님께 부르짖었으니, 응답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훈들을 지키겠다고 다짐하죠.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전반부에는 ‘부르짖었다’는 말씀이 계속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146-147절에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또 169절에서도 부르짖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그런가 하면 149절에서도 “내 소리를 들으소서”하고 고백하는데 그 역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과 같은 고백이죠.
왜 그렇게 ‘부르짖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까? 본문의 시편 기자가 왠지 절박한 상황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짖는 것 아니겠습니까? ‘갈이천정(渴而穿井)’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죠. 갈한 자, 곧 목마른 자가 ‘천정’ 곧 우물을 판다는 뜻입니다. 뭔가 목이 마르고, 갈한 심령의 소유자가 절박한 자세로 우물을 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주역에서는 ‘궁즉구 구즉변 변즉통’이라고 말하죠. 뭔가 궁핍하면 구하게 되고, 구하게 되면 변할 수 밖에 없고, 변하면 사람들과 통하게 된다는 뜻이죠. 본문의 시편기자도 그렇게 갈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45-146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무언가 조건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부르짖음을 듣고 응답하시면, 내가 주의 교훈을 지키고 주님의 증거들을 따르겠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응답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교훈과 증거를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조건을 걸어야할 만큼 시편 기자는 절박하고 간절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부르짖는 상황에 응답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오죽했으면 예레미야가 사위대 뜰에 갇혀 있을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갈한 심령으로 부르짖는 자의 소리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처한 절박한 사정을 외면하거나 인생의 힘들고 곤고한 사정에 등을 돌리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에 살면서 절박한 일이 있거나 간절한 상황에 직면했다면 그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 기대를 걸고, 간절히 구하면,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도와 주시는 분이시죠.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한숨, 타는 가슴과 타는 목마름의 갈증을 시원케 해 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자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죠.
그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부르짖고, 목말라 하는 심정으로 매달리면, 응답을 하시는 분인데, 무엇을 응답하시는가? 바로 말씀으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147-149절에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시는데, 곧바로 그 상황을 바꿔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판단과 섭리 속에서 발빠르게 그 상황을 즉각적으로 바꿔주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보편적인 응답의 방법은 말씀을 통해 먼저 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가시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의 사람으로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죠. 그러므로 급하고, 절박하고, 간절할수록,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떤 환상이나 어떤 계시나 어떤 꿈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기보다, 어떤 능력자의 예언에 기대기보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 문제의 갈급한 상황에 대한 응답을 받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가 아는 광주에 있는 교회 목사님이 부흥집회를 했는데, 그 분이 집회 시간에 예언기도를 해 줬는데, 이미 60이 넘으시고, 가난한 상황에 사시는데, 그 권사님에게 사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기도를 해 줬다는 것이죠. 또 젊은 청년에게는 한 달에 천만원의 십일조를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하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능력을 발하시면 모든 것이 한 순간에라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허망한 꿈만 부풀게 하는 예언이 되지 않았나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청년에게 한 예언은 젊으니까 기대감을 갖게 할 수 있지만, 그 늙으신 권사님에게 그런 예언이 오히려 실망감만 더 주는 격이지 않나 싶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까? 어떤 부흥강사나 또 다른 예언가의 예언에 기대기만 하면 자기 인생의 주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주체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 음성을 듣고 행동에 옮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더욱이 하나님의 음성은 정면을 통해 오는 것이지, 뒤로 오거나 옆에서 들려주는 음성은 대부분 사탄의 속임수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들이 갈한 심령의 상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만 내 요구나 내 욕망에 부응하는 응답을 기대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진짜 필요하고 중요한 경험은 말씀에 대한 경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 몸을 입으신 육화된 말씀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 그분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을 때,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이 깊어지고 달라지게 되죠. 신앙이 말씀의 신앙으로 견고해지게 되고, 어떤 흔들림도 없이 말씀 속에서 깊은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말씀이 없이 신비나 예언이나 환상에만 치우치면 곧장 넘어지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그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선물인지 그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죠. 말씀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면, 어떤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담대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의 기대, 선한 응답의 기대감을 갖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 이 시편 119편의 마지막 부분, 특별히 153-168절에 시편 기자의 고난과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과 핍박 받는 상황 속에서도 주의 말씀을 잊지 않았고, 주의 말씀을 구했으며, 주의 증거들을 구했고, 주의 말씀만 경외하고, 주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의 말씀을 따랐다고 고백하죠. 164절에서는 말씀으로 인해 “하루 일곱 번씩 주님을 찬양했다”고 표현할 정도죠. 그리고 165절에서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만큼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평안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얄팍하거나 변덕스런 평안이 아니라 크고 깊고 담대한 평안을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장애물이 없게 해 준다고 하죠. 이것은 인생에 아무런 문제도 어려움도 고민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어려움과 고민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신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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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들이 시편 119편의 총체적인 핵심이 주의 율법, 곧 주님의 말씀이듯이, 그 말씀이 내 영혼을 건지시도록, 그 말씀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시도록, 그 말씀이 내 영혼을 살리고, 내 인생길에 빛이요 생명이 되시도록, 그 말씀을 붙잡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모든 장애물이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에게 깊고 넓은 평강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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