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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가 끝나면 6시 30분에 닭 밥을 먹인다. 이내 손을 씻고 성경을 10장 정도 읽고 묵상한다. 그 뒤 그날 새벽에 나눈 말씀을 정리하여 블로그에 올린다. 이후 경제지를 중심으로 여러 신문을 인터넷에서 훑어본다. 8시 무렵이 되면 3층 집에 올라가 사과 한 조각과 함께 아침밥을 먹는다.
오늘은 그런 일상의 흐름을 깨고 새벽기도회가 끝난 뒤 곧바로 잠을 잤다. 너무나 피곤한 까닭이었다. 어젯밤 열대야에다 에어컨까지 고장 난 상태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더욱이 아내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라 아이들 뒷바라지로 바빴고 주일설교 작성으로 온종일 분주했다. 진액을 쏟아부은 전날이었다.
그렇게 피곤함을 달래고자 푹 자려고 했는데 잘 수가 없었다.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자 매일 같이 읽던 성경을 읽지 못한 것도 그렇고 새벽에 나눈 말씀을 블로그에 올리지 못한 것도 허전했다. 입안에 가시가 돋친 기분으로 선잠을 잤다. 더욱이 아침 7시 30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닭장을 넓힐 때 재료를 준 이웃에게 닭 한 마리 줬는데 그걸 요리할 시간이 없다며 다시 가져온 것이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내려가서 그 닭을 받아 사과나무 밑에 묻어 줬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시119:1∼5)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절을 갖고 있다. 무려 176절까지다. 그에 비해 2절로 구성된 시편 117편은 가장 짧다. 그러나 짧아도 가장 통이 큰 시편이 117편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나라와 백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시편 119편은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 하나님의 법과 교훈을 찬양한다. 이 시편의 거의 모든 행에 율법을 뜻하는 ‘토라’(תּוֹרָה)라는 단어나 그 동의어가 들어 있을 정도다.
그런데 시편 119편은 독특한 구조가 포함돼 있다. ‘여덟 얼굴’을 뜻하는 ‘팀나야 아페이’(Timnaya Apei)가 그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삼행시’(Acrostic Poem)와 같은 격이다. 176절로 구성된 시편 119편은 각각 8절 구절씩 히브리어 알파벳 22개가 순서대로 표기돼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어린이들에게 알파벳을 읽고 가르칠 때 이 시편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이 시편을 배우고 익혀서 하나님의 율법을 습관화하고자 했던 것이다.1)
물론 하나님의 율법은 규율처럼 암송하거나 강화한다고 해서 습관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율법은 강제한다고 해서 순종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율법을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빌3:1∼12).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기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며 사는 자들이다.
다만 율법의 기능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 비춰준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와 같은 죄인인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율법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순종하며 산다(약1:19∼27, 요일5:1∼4).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2)
어떻게 새벽 4시 20분에 일어나 아침 잠을 자지 않고 하루를 이어나갈 수 있냐고 묻는 이가 있다. 일상 속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어찌 하루에 10장씩 성경을 읽고 묵상할 수 있겠는가? 그 은혜 없이 어찌 매일매일의 새벽설교를 블로그에 올릴 수 있으랴? 아침 8시가 되기 전까지 그와 같은 일상의 아침을 맞이한다고 결단해서 될 일인가?
평범함이 비범함이다. 일상의 반복된 삶이 특별한 삶이 된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매일같이 그물질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 가난한 과부도 불의한 재판관을 향해 매일같이 억울함을 호소했기 때문에 그 한을 풀 수 있었다. 욥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기에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 일상의 반복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기에 피곤함도 답답함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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