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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116편은 구원의 감격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죽음’ 혹은 ‘사망’이라는 히브리 단어 ‘무트’가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죽음과 사망에서 하나님께서 건져 주셨으니, 어찌 그 구원의 감격을 하나님께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19절까지를 주제별로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로 3절에 보면 ‘사망의 줄’이 나오죠. 사망과 스올 곧 사망과 ‘음부’를 동일시하면서 어떤 상태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 곧 음부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환난과 슬픔’을 만나게 되었다, 하고 고백을 합니다. 그만큼 사망과 죽음은 우리를 고통으로 이끌어간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 죽음의 힘, 고통의 힘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신 것입니다. 고통의 상황과 고통의 시간으로부터 우리를 꺼내주시고, 건져내 주신 것 말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파도에 휩쓸려가는 누군가를, 절망의 늪에 허우적이는 누군가를, 하나님의 권능의 손으로 건져 올려주시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의 힘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는 내게 닥쳐 온 절망과 낙담을 이겨낼 길이 없지만, 위로부터 비춰주시는 주님의 빛과 사랑에 의해 그걸 이겨내는 것, 그것이 곧 구원 아닙니까?
8절을 다시 보면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사망에서 나오는 죽음’입니다. 시편 기자는 사망과 스올을 동일시하면서도, 사망은 영혼의 문제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망은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 거기에는 눈물과 넘어짐, 절망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누구와 있어야 할지 모릅니다. 마치 줄 끊어진 연(Knit)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끊어진 상태, 단절된 상태에서 ‘건지셨나이다’하고 고백을 합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시인을 건져 올려주신 것,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신 것,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의 영과 하나로 연결시켜 주신 것, 그것이 곧 구원이요, 그 큰 기쁨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으면 시인은 본문 13절을 통해 그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라고 말이죠. 마치 그 큰 잔치에서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누구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3번째로 ‘죽음’이란 단어가 등장하는데, 본문 15절입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여기에서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성도’ 또는 ‘하나님의 사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귀중한 것’이라는 단어는 ‘보석’이나 ‘왕’을 수식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성도, 거룩한 사도의 죽음은 보석과 같이 귀중하고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의 죽음도 하나님의 섭리에 속해 있는 일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3절과 8절에 언급한 사망은 다릅니다. 3절과 8절의 죽음 그냥 죽는 것, 그야말로 코끝의 호흡이 끊어진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나 15절의 죽음은 인간의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곧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성도의 영화로운 몸(glorification)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영적인 상태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모습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보석과 같다고, 왕의 보좌와 같이 귀중하다 고백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존귀하고 귀중한 죽음,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죽음을 성경에서 두 사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죽음을 기념하며 기뻐하는 절기인 유월절입니다. 이 날은 모든 장자들이 사망의 그늘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날이었습니다. 단,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에 칠한 이들만 구원을 받은 날입니다. 어떤 수고도 어떤 자격도 이 사망의 그늘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어린양의 피를 칠한 이들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죽음은 고통이고 단절이라, 이집트의 수많은 백성들은 통곡했습니다. 장자의 죽음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믿어온 신들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물질로도 능력으로도 막지 못했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한 이들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하나님, 그들의 선조와 언약을 맺으신 그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유월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애굽의 종의 사슬을 끊게 되었고, 하나님의 권능을 붙잡는 사건, 다시 말해 생명 줄을 연잇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둘째로, 죽음과 연결되는 예전이 있습니다. 바로 성만찬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기 전날 밤,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떡을 때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고전11:24) 또한 식후에 또한 잔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11:25)하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양이 되심으로 온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분의 죄사함의 보혈을 믿는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되고, 구원받는 자들이 그분의 살과 피를 대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유월절을 통해 구원하시고, 출애굽 시켜 주셔서,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까지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죠. 그래서 유월절의 축제가 실은 성만찬의 축제로 연결된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곧 우리 자신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6-17절 보면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또한 빌립보서 3:10-11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렇기에 주님의 그 성만찬을 ‘축복의 잔’이자 ‘축복의 떡’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잔과 떡에 참여함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고 선언을 하죠. 동시에 그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도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선포하죠.
그런 은총에 참여하는 자, 그런 성만찬에 참여하는 성도의 죽음은 그래서 존귀하고 귀중한 죽음이 되는 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들판에 나가면 객사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 성도는 어떤 환경이나 처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귀하고 존귀하게 받아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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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우리에게 주어진 날 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섭리하시는 데로, 100세면 100세, 80세면 80세 그 천수를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나는 날,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존귀하고 귀하게 받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을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설령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죽음과 스올의 상황이 닥쳐왔다 할지라도, 그 모든 초점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맞추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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