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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113편은 111편부터 118편까지 합해 ‘할렐 시편’으로 불립니다. 할렐 시편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곧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에 낭송된 시들이었습니다. 특히 유월절에 빠지지 않는 낭송시였습니다. 이 시들은 구원의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내용이 담긴 시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데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애굽의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보호받고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죠.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신 그 분이 인생의 주권자이시기에 그 분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1절에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고 시편 기자가 고백하고 있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 그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여호와의 종들아’하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은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표현으로서, 자기 자신들을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 분은 우리 주인이시자, 왕이십니다. 그 분의 대속을 통해 우리가 영적인 자유를 얻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우리도 우리 자신을 ‘종으로’ 칭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도 각자 신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신이란 미신을 포함한 신, 곧 위대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야훼 하나님에 비하면, 잡신임에 틀림 없죠. 그래서 영어로 하나님을 ‘God’로 표기하고, 다른 신들을 그저 ‘god’ 정도로 표기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여호와 하나님,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적인 자유를 주신 그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읽은 시편 113편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셔야 하는데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찬양받으셔야 함을 강조합니다. 2절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은 시공간의 초월자이시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속에서 그 분을 찬양하는 것,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말입니다. 우리가 코끝의 호흡이 사라지는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 입성한 이후에도 영원토록 그 분을 찬양할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시간만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3절 말씀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을 초월해서도 찬양을 받으셔야 함을 강조합니다. 3절에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과연 무엇을 강조하는 말씀입니까? 이 지구상에 해가 뜨지 않는 장소는 없습니다. 모든 곳에 해가 비칩니다. 그런데도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라고 표현한 건, 이 세계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인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이 읽혀지는 절기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사건과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유월절에 할렐 찬양시를 더더욱 많이 불렀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찬양하는 것, 그리고 공간을 초월해서 찬양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 세계 모든 인류를 위한 시간과 공간 안에 그 구원의 역사가 펼쳐졌다는 점입니다. 바꿔 말해 구원의 하나님은 유대인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모든 자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그런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시편 113편은 111편부터 118편까지 합해 ‘할렐 시편’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세계속에서도 말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모든 차원에서도 하나님께 찬양함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몸과 마음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죠.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심을 찬양하는데,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하루 24시간 온전히 하나님을 찬양치 못한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하루 중 1시간도 집중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역부족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밥을 하는 순간에도, 내가 설거지를 하는 때에도, 내가 일터의 동료를 만나고, 누군가 고객을 만나고, 내가 길거리에 가는 그 모든 순간순간을 주님께 의탁하며 살아가는 한, 그 모든 24시간이 주님을 찬양하는 시간이 된다는 것,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삶이니 말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 4절의 고백처럼 이렇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한 절에 두 번씩이나 표현하고 있는데, 그만큼 하나님의 높으심을 찬양하는 삶을, 우리의 삶으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출애굽 당시의 열강이던 애굽은 무소불휘의 권력을 지니지 않았습니까? 세계 최강국이었죠. 그런데 그런 나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해 높으시다고, 위대하시고 찬양하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오늘날 적절한 표현으로 바꾸어본다면 ‘우주’ 정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보다 높으시도다’, 하는 고백과 같이 시인도 그렇고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높으심을 그렇게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하늘보다 높으신 분, 우주보다 높으신 분, 이라고 표현하는데,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른바 ‘자기 비하’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잘 나가고 높아진 시절만 이야기하면, 거리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누구든지 함께 하고 싶어합니다. 잘 난체 하고, 교만한 체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함께 하기 싫은 속성이 있죠. 그래서 늘 ‘자기 비하’를 하는 사람은 사람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리 주님도 바로 그런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런 분이셨죠.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본체의 자리를 내려 놓고, 이 땅 비천한 자리에 친히 강림하셨으니 말입니다.
그것을 6절에서 표현합니다.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인 천지를 살피시기 위해서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스스로 낮추사”가 바로 ‘자기 비하’에 해당하는 것이죠. 물론 ‘자기 비하’의 가장 큰 사건은 죄인을 구원하시러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이 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러 ‘스스로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어느 신이 스스로 낮추사 인간에게 오셨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낮추심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죠. 그 분이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신 십자가의 사건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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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 높으신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요, 그 분의 자기 비하, 곧 한 없이 낮아지심을 좇아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겸손한 삶을 살 수 있는 대림절 한 주간의 삶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주님이 낮아지셔서, 이 땅에 오시고,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놓기까지 낮추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 분을 만 왕의 왕으로 세워주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를 낮추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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