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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신앙은 확연하게 그 의미가 구별되는 단어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신학은 “신이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맺고 있는 관계와 신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앙은 “믿고 받드는 일, 초자연적인 절대자 곧 창조자에 대한 신자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ㆍ사랑ㆍ의뢰심을 갖는 일” 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만큼 신앙생활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 또 믿는 것을 실제 삶 가운데 경험하는 영적인 삶을 뜻합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등을 공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에 다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따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등 참으로 다양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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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118편에서 시인은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한 즉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권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백성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온 이후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함께 찬양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에스라 3장 10-11절이 이와 같습니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성전의 기초를 다시 놓을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지난 삶 가운데 지극히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8편의 1절 내용은 맨 마지막 29절에서 다시금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8절까지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 곧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내가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되십니다. 5절에서 “그가 고통 가운데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넓은 곳에 세우셨다.”고 고백합니다.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우리의 간구에 들으시는 하나님, 나의 편에 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신실하시기에 시인이 8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그 어떤 높은 사람들보다도 더 낫다”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시인은 지난날의 경험 속에서 오직 그 분께 피해 있으면 아무리 원수가 에워싼다 할지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을 수 있다고, 그들을 손아귀에서 구원해 주신 분이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내가 진심으로 믿고 피할 수 있는 하나님의 그 날개 아래 안전하게 머물 때, 우리의 입술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14절의 고백과 같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고 나의 구원이시라”하는 고백 말입니다.
두 번째로 시인이 하나님이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내가 들어가야 할 구원의 문’이 되신다고 찬양합니다. 아무런 가치 없이 버려질 수밖에 없던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모퉁이 돌처럼 가장 귀하게 바꿔 주십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인간들이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갈 때,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따라서 그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양의 문이 되시고, 생명의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 날은 기쁨의 날이요, 축제의 날이요, 영생의 날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시인은 피난처가 되시고 구원의 문이 되신 하나님을 그의 일생을 통해 경험하면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 많으시고, 신실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분인지, 그 분이 참된 위로자요 ‘풀어놓아 다니게 하시는 해방자’이신지, 그 입술을 통해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신 그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들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경험, 그 분을 만나는 체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주변의 것에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로 인해 참 많은 상처를 받고, 또 실망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며 참된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걸어갔을 때에는 놀랍게도 물 위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한 환경, 주변 상황에 현혹될 때 그는 그만 물에 빠져 버렸죠.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자꾸 마음을 쏟고, 더 관심을 갖게 되면 반드시 그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시인이 8절과 9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도, 심지어는 목회자들까지도, 완전한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어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오늘날 각종 매체를 통해 너무나도 쉽게 교회의 어려움과 안타까운 부분들, 또 기독교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행하는 죄악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이 실망하고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가나안 교인’, 교회를 ‘안나가 교인’,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무려 400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기존 교회에 상처받고 좌절한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우리의 눈과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둬야 할지 우리는 더더욱 명확해 집니다. 언제 어디서나 한결 같이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그 분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전능자이십니다. 그 분의 이름만 불러도 마귀가 떠나가고, 나를 억누르는 원수까지도 다 떠나가게 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권능의 오른 손은 능치 못하실 일이 없는 창조주 하나님이요, 건축자가 버린 돌까지도 그 집의 가장 중요한 모퉁이 돌로 삼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때로 넘어지고 연약하고 시험에 들더라도, 우리의 시선은 오직 그 분께 고정하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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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도 피난처 되시고 구원의 문이 되신 하나님께만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며 사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 분을 의지하는 자들은 어떤 풍파나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그것들에 의해 요동하지 않고, 오직 반석이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며, 하루 하루 담대하게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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