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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시109:1-31)

by 똑똑이채널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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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9편은 소위 말하는 ‘저주시’입니다. 그 내용이 민망할 정도로 저주를 퍼붓고 있어서 성경에 왜 이런 내용이 기록돼 있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의하면 이 시편의 저자가 다윗으로 추정되는데, 단순히 자기에게 해코지 한다고 이렇게 저주를 퍼부어도 되는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또 이런 내용이 원수도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너무 상반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죠. 이 시편의 내용을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향해 저주하는 기도를 드리기도 하죠.

그래서 때로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 좀 더 진화한 형태로 기도를 드리는 이들이 있죠. 이렇게 말입니다. ‘네 영혼아 네 돈을 떼먹고, 너를 억울하게 하고, 너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있느냐. 그 사람에게 네가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기도로 풀어라. 시편 109편에서도 다윗이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기도로 풀지 않았느냐. 네가 직접 원수를 갚으면 네 손이, 네 입이 더러워지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치시도록 너는 다만 기도하거라. 시편 109편이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지 않느냐.’ 그렇게 기도하면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 달라고 기도만 드리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 말입니다. 직접 원수를 갚은 경우도 훨씬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는 게 과연 옳겠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렇게 기도하는 게 과연 도덕적 차원에서 지지를 받는 일이겠는가,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직접 우리의 원수를 때리거나 죽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그 사람을 죽여주십시오’하고 기도한다면, 과연 그것이 살인하는 것과 뭐가 다를 게 있냐는 것이죠. 십계명의 제 6계명 ‘살인하지 말라’에 대해 배웠는데, 그것은 문자적인 살인을 넘어 그 본질은 ‘마음으로라도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을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과연 내 마음으로 살인하지 않는 일이겠습니까? 오히려 그렇게 죽여 달라고 하는 기도는, 내가 힘이 없어서 직접 원수를 갚거나 분풀이를 하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달라는 청하는, 고상한 청부살인에 지나지 않는 격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더 나가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도는 원수를 직접 갚는 게 아니라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질 때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주도록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그를 통해 ‘나는 평안하다’ 하는 경우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부름을 해결하는 흥신소가 아니죠. 그렇기에 오늘 읽은 시편 109편은 우리가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 원수를 갚아 달라고, 청하거나 소원풀이 정도로 기도하라는 그런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그런 오해와 잘못된 이해를 하지 않도록 해 주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시편은 그 내용의 초점이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 무리에게 맞춰져 있지 않다는 게 그것이죠. 철저히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겪고 있고, 내 원수가 어떤 일을 했고, 그 사람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고,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이런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시편 기자는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고, 원수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이야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억울한 일을 호소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시작하는 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시편 109편은 그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1-5절까지로 하나님의 행동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으며, 악당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그것을 이야기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하고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 묻고 있는 시입니다.

둘째 부분은 6-20절까지로 ‘하나님의 공의를 간구하는 기도’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들을 보면 정말로 기가 막힙니다. 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일들을 전부 언급해 놓은 듯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참한 일들을 그 악당들에게 허락하시는 분이 누구라고 말합니까? 20절을 보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라고 고백하죠.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이 모든 저주의 내용을 허락하시고 실현시키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이런 형벌을 받는 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묵과하시지 않으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부분은 21-31절까지로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에 근거해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의 시편은 그 중심과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라 간섭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악을 방관하시거나 방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공의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그리고 세 번째는 심령이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인자를 베푸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죠. 그토록 오늘 본문은 다윗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살펴 볼 110편에서는 ‘하나님의 승리하심’과 ‘그 분의 권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더욱더 확고하게 해 주는 말씀이 본문 8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하는 게 그 말씀입니다. 과연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사도행전 1장16-20절 말씀은 본문 8절 말씀, 그러니까 하나님의 승리와 권능에 대해 더욱더 분명하게 설명해줍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베드로가 가롯 유다와 관련하여 설교한 내용인데,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하는 말씀을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중의 한 명이었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가르침도 받은 자였죠.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제거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그 직분이 ‘타인’ 곧 ‘맛디아’에게 넘어갔죠. 그것을 바라보며 베드로가 본문 8절 말씀을 인용해, 하나님께서 성취한 사건이라고 설교한 것입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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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 오늘 본문의 의미를 더 확고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편 109편 말씀은 단순히 나를 괴롭히거나 억울하게 한 사람을 기도로 대적하고 저주를 퍼부으면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주신다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알고 말씀을 깨달으면서도, 그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기는커녕 그 은혜와 사랑을 멸시하고 오히려 그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을 핍박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을 결단코 그냥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결국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을 해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너희 하나님의 사람들아, 너희는 너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선으로 악을 이겨라, 심판과 저주는 내가 알아서 행할 일이니라, 하는 그런 뜻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인 초점은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 주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이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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