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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시110:1-7)

by 똑똑이채널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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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110편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보좌에 앉으실 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왕이신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위에 자기를 다스리는 ‘주님’이 계신다는 걸 겸손하게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그 주님이 곧 여호와 하나님, 야훼 하나님이시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주님’으로 곧 ‘아도나이’로 불렀습니다. 히브리어 ‘아도나이’는 신을 의미하는 단어라기보다는 소속관계의 주인을 칭하는 말입니다. 이른바 지파의 수장을 향해서, 또 군대의 지휘관을 향해서,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곧잘 ‘아도나이’로 불렀습니다. 그런 뜻에서 다윗도 자신의 참된 수장, 또는 지휘관, 참된 주인으로서, 자신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도나이’ 곧 ‘주님’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늘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곤란한 질문을 받으시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른바 바리새인 무리들을 향해 던진 질문이셨죠.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때 주님은 그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22:44) 예수님은 그 유대인들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22:45) 그러자 유대인들은 더 이상 주님에게 대답하지 못했다고 성경은 증언하죠. 그때 나누신 주님의 그 말씀은 실은 읽은 시편 110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생각게 해 줍니까? 다윗은 이 시를 통해서 벌써부터 장차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는 그만큼 메시아를 고대하는 시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가운데 시편 110편만큼 많이 인용된 시도 없습니다.

 

다윗은 1절을 통해 여호와께서 그리스도에게 하신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그리고 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능으로 원수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을 하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그리고 이제 3절 상반절에서 어떻게 고백합니까?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한다, 이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원수들과 제압하려고 나아가실 때에, 주의 백성들이 그분의 영광스러운 일에 참여한다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헌신하다’는 히브리어 ‘네다바’(נדבה)는 ‘스스로 자원하여, 기뻐서 , 아낌없이 -을 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 나아오는 것이 누군가의 권고나 의무로 하는 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자기 스스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할 주님의 백성들은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기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나라는 상비군을 두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있을 때마다 군대를 모집해서 전쟁을 수행했죠. 그래서 존경받는 사사나 왕이 군대를 소집하면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원해서 그 군사가 되려했죠. 그러나 지도자가 무능하면 자원자가 적어 사기가 크게 떨어졌죠.

그것은 로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패배를 모르는 강한 군대를 말할 때 흔히 고대 로마의 군대를 떠올립니다. 테베레 강변의 조그만 도시국가에서 시작해 대 제국을 이룬 로마 군대에는 본래 급료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을 자부심으로 알고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이죠. 바로 그것이 로마를 강력한 나라로 만든 배경이었죠.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여 군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로마시민의 권리였죠. 그들은 군대로 자원할 때 자신의 병기조차 자신이 마련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중장비로 무장하여 중보병이 되었고, 가난하면 칼만 들었고, 그럴 비용조차 없으면 적에게 던질 돌만 들고 맨몸으로 입대했습니다. 패배를 모르는 최강의 군대는 국가에서 칼 한 자루 지급받지 않는 자원자로 구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 마리우스에 의해 로마의 군대제도가 재편되었습니다. 군인이 직업이 되었고, 급료를 지급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군복무를 마치면 누구든지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습니다. 로마군대는 그때부터 국가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급료와 전쟁의 대가를 많이 지불해 주는 사령관에게 충성하는 말 그대로 용병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훗날 군대가 왕을 세우는 내란의 시대가 다가왔고, 그것이 로마 멸망의 단초가 되었던 것이죠. 대가를 바라고 싸우는 병사는 용병일 뿐, 진정한 용사일 수가 없는 셈입니다. 용병은 자신의 수고를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을 계산하는 자요, 자기 계산이 맞지 않으면 훌훌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권능의 날에 그리스도께서 소집할 자는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 모두가 자원하는 백성들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여 주님의 군대가 돼야 하는 것이죠. 주님은 주의 백성을 모으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는 것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따름의 대가로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거나, 권세를 주겠다거나,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 고용된 용병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자원한 주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일꾼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모두가 자원해서 주님께 헌신한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본문 3절 하반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하고 말입니다. 주님의 군대로 모이는 자들,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자원한 자들이 실은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과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실 새벽이슬은 햇빛이 나면 금방 사라지는 연약한 존재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팔레스타인의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식물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자랄 수 있는 것은 바로 새벽이슬 덕분입니다. 그처럼 성도의 영향력도 때로는 미미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헌신들이 모여 실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교회에도 보이지 않게 헌신하는 이들이 많죠. 특별히 주어진 자기 직장과 일터의 관계된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헌신하는 분들 말입니다. 그 분들의 영향력이 미미해 보여도,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열 아래에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 같아도, 그러나 새벽이슬과 같은 존재들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존재들 덕분에 식물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는 것처럼, 교회도 그런 분들에 의해 자라고 성장하는 것이죠. 그것은 말없이 기도로 헌신하고, 봉사로 헌신하는 자들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젊은 시절을 가리켜 새벽이슬에 비유하기도 하죠. 새벽이슬하면 신선하고 깨끗하다는 느낌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짧게 있다가 사라지는 이미지도 있죠. 젊고 건강한 때에는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금방 세월은 가고 여기저기 아픈 데가 생겨나죠. 그래서 시편 90편은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고, 신속히 날아간다고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숫자상으로 20대나 30대가 아니어도, 40대, 50대, 60대, 70대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날들을 짧게 생각하면서, 그 때에 맞게 하나님께 ‘즐겁게’ 나아가는 이 시대의 새벽이슬과 같은 삶을 살면 된다는 점입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하고 더 가치 있는 주의 군대는 없기 때문입니다.

 

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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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지닌 영향력이 해가 뜨면 사라질 새벽이슬처럼 작고 연약하고, 삶의 자리에 부족한 것이 더 많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더욱 감화되어 말씀 앞에 즐거이 헌신하는 사람, 그가 곧 주님의 싱그러운 청년들이라는 사실, 오늘도 주님의 부르심에 즐거이 응답하는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의 삶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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