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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바위의 돔’, 곧 황금사원을 봤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을 위한 성지 순례의 장소이자, 제단의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입니다. 일반인들은 그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본래 바위의 돔이 위치한 성전 지역은 헤롯 성전이 위치한 장소였습니다. 로마에 의해 무너진 헤롯 성전의 그 자리에 이슬람 세력이 바위의 돔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성을 부각시킨 것이었죠. 바위의 돔은 그 지붕이 황금색이라 참 너무나도 화려했습니다. 마치 이슬람의 야망이 태양처럼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헤롯 성전이 헤롯의 야망으로 우뚝 솟아올라 있었던 것과 똑같은 격이었죠.
그렇듯 성전은 예루살렘 성읍과는 거리가 먼 로마 제국에 의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십자군에 의해, 그리고 또 이슬람 세력에 의해 계속 해서 무너지고 세워지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렇다보니 예수님 시대의 진정한 본 형체는 지금 높이보다 50미터 아래에 깔려 있죠. 그것을 고고학적인 용어로 ‘테루 현상’이라고 하죠. 계속 새로운 세력들이 짓밟고, 그 위에 자신들의 이름값을 높이려고 새로운 건물들을 웅장하게 짓다보니, 예수님 시대의 진정한 자취는 다 땅 속에 묻혀 버렸다는 점이죠.
그런데 그것이 건물만 그렇게 해 왔겠습니까? 로마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들을 억압할 때, 로마의 황제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황제들은 옛 치적에 비해 더 높고 더 화려한 치적을 세우지 않았겠습니까? 더욱이 로마의 황제들은 그 당시 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할 때에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게 하는 제도, 곧 황제숭배사상을 만연케 했습니다. 그만큼 1인지상의 세계를 만 천하에 알림으로써 자신이 경배를 받고, 자신이 영원토록 군림하기 위한 차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토록 위대한 헤롯 성전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장악한 그들의 성전도 십자군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고, 그 뒤 십자군이 세운 성전도 또 다시 무너졌고, 그리고 지금은 그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황금사원, 곧 바위의 돔이 세워져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건물 자체를 신성시하고, 우상화하면 할수록 인간의 심성은 황폐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건물 너머에 진정한 신을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당은 구약시대의 성전개념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짐승을 잡아 제사 드리는 기능이 있는 장소였습니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성전의 기능처럼, 짐승을 잡아 제사드리지 않습니다. 다만 영원한 산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더 이상 짐승의 제사가 필요치 않게 된 것이죠.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까지도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제 3성전을 세우려고 준비하고 있고, 그곳에서 구약시대의 제사제도를 복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엉뚱한 모습이겠습니까?
무엇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까? 구약시대의 성전을 하나님처럼 신성시하고, 우상화할 때, 성전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성전을 바벨론 제국에 의해 파멸시키게 했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성전 안에서 제사는 드리지만,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것은 신약시대의 헤롯 성전도 똑같았습니다. 헤롯이 46년 동안 보수한 그 성전을 당대의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신성시하고 우상화하고, 성전을 통해 자기 권력화 할 때, 그 성전 역시 로마 제국에 의해 무너지게 하셨죠.
그런 역사를 안다면, 오늘날의 교회 예배당의 기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우리는 환하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 예배당 자체는 예배드리는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 족하죠. 그 예배당을 구약의 성전처럼 화려하게 또 이슬람의 황금사원 돔처럼 황금으로 치장하거나, 엄청난 돈을 써서 구축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박할지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능을 갖추면 좋겠죠. 그래서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 하나님께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이 들도록, 그렇게 꾸미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고, 기도드리는 사람의 심령이죠. 하나님을 경배하는 심령이 예배당 안에서나 예배당 밖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을 향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랬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걸어다니는 참된 성전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예배하다’는 말 속에 ‘섬기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언가를 섬기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죠. 오늘 읽은 시편 100편은 이스라엘 회중이 성전에 들어가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일종의 예배 입당송입니다. 입당행렬을 하면서 회중은 오늘의 시편으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1-2)
입당하며 찬양하는 그들의 행렬을 마음 속으로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북쪽 단에서 남쪽 브엘세바까지 각처에서 몰려온 자들이 성전 문에 서서 외칩니다. 기쁨으로 소리쳐라, 여호와를 향해서 외쳐라. 그 곳에는 많은 사연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가슴 벅찬 사람도 있고, 아픈 가슴으로 예배하러 온 자도 있고, 기쁨으로 소리친 자도 있고, 도저히 소리칠 수 없는 심정을 안고 온 사람도 있겠죠. 그들이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갖고 있든, 그들 모두는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온 자들입니다.
다들 그 자리에 오지 않았다면 더 큰 쾌락, 재물, 자리,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택하기 위해 그들은 다른 것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택하는 것이 예배이고, 섬김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것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게 아니라 한 분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과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새벽에도 기도를 드리러 예배당에 나옵니다. 수요일 저녁에도, 금요일 저녁에도, 그리고 주일날에도 예배당에 나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예배당에 나와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경배하고 끝나버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음성을 들었다면, 세상 밖에 나가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 예배당을 찾는다는 것,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차장의 기능보다, 주유소의 기능이 중요한 것이죠. 기름을 충전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 말입니다. 오늘 그렇기에 성전에 들어가면서 회중들이 부르는 노래소리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5절) 이들의 예배가 성전에만 갇혀 있는 게 아니라면, 시편 100편의 노래는 성전을 나온 회중의 삶이 되고 곧 그들의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만을 택하고 섬기며, 예배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도, 예배당 안과 밖에서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그들이야말로 시편 100편이 참된 인생, 영원한 인생의 찬미가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다. 야망으로 세워진 성전들, 인간의 영광으로 세운 예배당들은 시간 속에 다 무너져 내리지만, 진정한 예배자들로 세워진 예배당은 비록 그 예배당이 소박할지라도 그 어떤 건물보다도 진실된 예배당이 될 것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런 예배당에서 예배하는 자들은 예배당 밖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곳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를 위해 이 새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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