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오늘 읽은 시편 98편은 과거에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장차 의와 공평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시입니다.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앞으로도 그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할 것을 바라는 시입니다.
1절은 이 시의 서언으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시인이 왜 하나님을 향해 새 노래로 찬양토록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 곧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뒤 3절까지는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3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이른바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증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하나님의 공의를 세계 만방에 어떻게 펼쳐보이셨는지, 그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이죠. 그들의 선조를 통해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4-8절까지는 온 땅을 향하여 하나님을 즐겁게 찬양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하고 있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온 소리를 높여서, 수금으로 또 음성으로, 나팔과 호각 소리로 찬양하라고,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되,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온 세계가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소리칩니다. 그야말로 온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라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그 분이 온 우주의 창조자요,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온 세상에 행하실 종말론적 심판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양의 근거가 되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심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주의 종말을 바라보면서, 그 분의 심판주 되심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다만 그 분의 심판은 의로우심으로, 공평으로 판단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앞에 누구든 자기 의로움을 내세울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선을 행하고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시죠.
그것이 이 시의 전반적인 아웃 라인이라면, 좀 더 구체적인 부분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1-3절을 보면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기 쉬운 신앙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를 위하여”라는 표현과,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다”라는 표현입니다. 1절에서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은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과연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 근원을 따져 생각하면 그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곧 우리의 영광이며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참 빛을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그야말로 허상 속에 갇힌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부족하심 없이 온전히 영광스러우신 분이시죠. 그러나 그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영광을 우리의 모습과 연계시키면서까지 우리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만큼 당신의 백성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에 비해 우리는 과연 그 하나님을 온전히 뜨겁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초라한 고백들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살아야 하는데도, 오히려 세상 속에 매몰된 채 세상의 가치관만을 좇으며 사는 모습들 말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채, 세상의 욕망만 중심이 되어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더 나아가 아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한다는 일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지 말입니다. 그것이 곧 십계명의 제 3계명인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행위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 앞에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세워, 당신의 영광을 우리와 연계시키시면서 까지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좌절하고, 또 세상의 가치관에 매몰되더라도, 다시금 말씀을 붙잡아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다시 설 수 있으니 말입니다.
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함이라면, 두 번째는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자’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죠.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애굽에서 400년 간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되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이 범죄 하면 징계하시되 그들을 버리지 않고 회개토록 하여 다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약속에 따라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가나안에 정착한 후로 그들이 범죄 하였을 때에는 앗수르나 바벨론을 통하여 징계하셨지만, 그 일로 그들이 회개 할 때 그들에게 주신 언약을 따라 다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조건이나 행위로 보아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와 언약에 대한 성실하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원을 약속하신 존재를 결단코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쉽게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물론 그 언약의 대상자들이 언약을 파기 할 때에 그들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징계는 인간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마치 버리시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가혹한 때도 있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그들을 다시 회복하시며 반드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은 오늘 우리의 구원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 있을 지라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소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 가운데 있을 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속에서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며 믿음의 발걸음을 디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날마다 기억하며, 그 말씀 속에서 힘을 얻는 복된 날이기를 소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문에 들어가며(시100:1-5) (0) | 2022.07.07 |
---|---|
여호와는 위대하시고(시99:1-9) (0) | 2022.07.06 |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시97:1-12) (0) | 2022.07.04 |
여호와는 위대하시니(시96:1-13) (0) | 2022.07.02 |
므리바에서와 같이(시95:1-11) (0) | 2022.07.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