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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96편은 저자가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와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역대상 16장을 보면, 누가 썼는지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역대상 16장은 다윗이 이 시를 지어 아삽과 그 형제들에게 부르게 한 찬송시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과 거의 흡사한 내용이 역대상 16장 23-33절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역대상 16장은 다윗이 예루살렘에 성막을 세우고 그곳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안치한 것을 감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 그 언약궤, 곧 법궤는 실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이 늙고, 그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을 때,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리하게 되자, 홉니와 비느하스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언약궤, 그 법궤를 전투현장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이유인 즉 그 법궤를 앞세우면 하나님께서 능히 그 전투에서 승리해 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패하게 하셨습니다. 법궤를 부적으로 여긴 까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전투에서 패한 이스라엘은, 법궤마저 블레셋 군대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법궤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이 고초를 겪게 됩니다. 이방 민족들에게 그 법궤는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그 법궤를 부적으로 여길때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그 법궤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표증으로 보여준 것이었죠. 그래서 블레셋 백성들에게 질병이 임하자, 더 이상 그 법궤를 그 땅에 둘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그 법궤를 다시금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를 통해 새 수레에 법궤를 끌고서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가게 했고, 곧이어 그 법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모시게 되었죠.
그런데 그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도 멋 모르고 법궤를 수레에 끌고 오게 하는데, 그때 소들이 뛸 때 웃사와 아효라는 그 집의 아들들이 법궤 앞에서 거드름을 피웠는데, 웃사가 그 법궤를 함부로 만지고, 자기가 주인행세를 할 때 그만 하나님의 진노하심 가운데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다윗이 법궤를 옮겨오는 걸 멈추고, 잠시 오벧에돔의 집에 모시도록 하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금 법궤를 다윗 성으로 모시고 오게 하는데, 그때는 레위인들을 동원해서 법궤를 어깨에 매고 오게 했고, 그리고 찬양대를 조직해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며 그 법궤를 모셔오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시로 쓴 게 역대상 16장의 내용이었고, 오늘 읽은 시편 96편의 내용과 흡사한 시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그때 법궤를 옮기면서 써내려간 그 시의 의미 속에 무엇을 담아 고백했을지 환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출애굽 하여 광야 생활로부터 떠돌아다니던 그 법궤가 드디어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고 영원토록 모실 수 있게 되었다는 마음에 기쁨이 일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사울 왕 때에는 법궤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다윗은 왕이 되어 그 무엇보다도 법궤에 신경을 썼고, 그 법궤를 모셔오게 되었으니, 그 법궤와 함께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겠습니까? 바꿔 말해 그 법궤를 통한 다윗 왕국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고, 기뻐해주신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점이죠. 한마디로 다윗은 그 법궤를 옮겨오면서, 과거에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앞으로 자기 왕권 속에 부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했던 것입니다.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미래에 베푸실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며 본문의 시를 써 내려간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는 언약궤가 항상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성막이 먼저 움직였고, 그 성막이 움직였다는 것은 성막의 가장 핵심인 법궤가 움직였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야말로 사람의 몸으로 빗댄다면 그 법궤는 사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법궤를 만들게 하셨고, 그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여정을 인도하도록 한 표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법궤에서 이스라엘과 만나고 거기서 함께 계시하시겠다고 출애굽기 25장 22절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그렇게 언약궤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과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삶을 이루는 것이죠. 그만큼 그들이 성취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 있는 일이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모든 소유가 실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일이니 말입니다.
바로 다윗도 그 사실을 절실히 깨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의 7명의 형들과 달리 여덟 번째 배다른 아들로 태어난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한 나라의 왕은 꿈꿀 수도 없는 형편이었는데, 형들의 틈바구니에 밀려 한낱 양치기에 불과한 자신을 일국의 왕으로 삼아주셨고, 또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초석으로 삼아주셨으니, 어찌 자신의 왕 됨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역사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본문 1-5절을 통해 그렇게 찬양하고 있는 것이죠.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하나님께서 기이한 행적으로 구원을 베푸시니, 모든 신들은 헛것에 불과하고 우상에 불과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진실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양해야 한다고 고백하는데,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과거에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속에 새기고 있는 자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일 속에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펼쳐주실 것을 믿기에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미래가 기다리고 있고, 그 미래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새롭게 임할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과거형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로운 날을 맞이할 때에도 함께 하신다는 거죠.
그래서 예루살렘의 패망이라는 재난 앞에 예레미야가 절망에 빠졌지만 그런 와중에도 예레미야의 입술에는 새로운 노래, 새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베푸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변함이 없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영원토록 신실하실 것을 바라봤던 까닭입니다. 내 눈에는 만족함이 없고, 내 마음에는 비록 차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기필코 아름답고 선한 길을 펼쳐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 소망 가운데 예레미야는 비록 지금 당장은 마음이 아프고 괴롭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그런 찬양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시도소이다”(예레미야애가3:22-23).
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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