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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므리바에서와 같이(시95:1-11)

by 똑똑이채널 2022.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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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읽을수록 참 감미롭습니다. 그리고 참 인간적입니다. 인간의 고민과 갈등, 몸 부름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솔한 고백과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왕의 왕이 되어주신 하나님을 향해, 이스라엘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그것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도 그렇게 고백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구원의 하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자고, 감사함으로 그 분 앞에 나아가 시를 지어서 즐겁게 찬양하고 노래하자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이 크신 분이시고,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신 만 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도 그렇게 고백합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참으로 멋진 고백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진심어린 경배는 시간을 불문하고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본문의 후반부, 그것도 결론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이토록 찬양하며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절인 11절에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초반부에는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경배하자고, 온 소리를 높여 찬양하자고, 하는데, 후반부에서는 그것도 끝나는 지점에서는 뜬금없이 너희 백성들은 내 안식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완전히 잘라버리는 듯한 모습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을 즐겁게 찬양하고 고백하는데, 완전히 딴 판으로 변해버린 것 같은,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8절에 나오는 ‘므리바’을 연상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본문 8-9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여기에 나오는 ‘므리바’는 무엇이고, 또 ‘광야의 맛사’는 어느 곳을 칭하는 것이겠습니까? 또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실 오늘 본문은 민수기 20장을 함께 읽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시편입니다. 민수기 20장은 우선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혈육의 죽음 앞에 감정을 추스리기도 전, 이스라엘 백성은 실의의 빠진 아론과 모세를 대적하게 되죠. 그때 그들은 자신들의 갈증 때문에,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냈냐며, 모세에게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야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고, 그야말로 척박한 땅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항의는 비록 모세를 향한 항의가 아니라, 자신들을 이끄신 하나님을 향한 항의였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이곳 광야로 내 몰아 힘들고 지치게 만들었냐면서, 항의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가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며, 그 일을 거울 삼도록,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8절에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사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한 곳은 ‘므리바’와 ‘맛사’였습니다. 므리바는 성경 앞에 각주가 있습니다.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맛사’는 고난 그리고 시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즉, 광야 그 자체의 이름이 고난과 시험, 그리고 다툼의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 모세까지도 철저히 고난과 시험의 다툼 앞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백성들이 불평하고 항의하면, 그들을 이끈 지도자 모세가 어찌 그들의 불평과 항의에 가만히 있을 수만 있겠습니까? 모세도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 앞에 중재자로서 괴로움이 밀려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다들 잘 아시겠지만, 모세와 아론의 간청으로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지만 모세는 그만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실수합니다. 그 반석을 두 번씩이나 내리 친 것 말입니다. 그로 인해 모세는 가나안 땅의 입성을 허락받지 못하게 되죠. 그 뿐만 아니라 아론은 그 사건 이후에 곧장 세상을 떠나고 말죠. 그런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으로는 새로운 가나안 땅에서는 참된 지도력, 하나님 앞에 더욱더 순종하는 지도력을 볼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찌됐든 그 아론과 모세, 그리고 출애굽의 영광을 보았던 출애굽 1세대들은 가나안 입성을 앞둔 2년 전에 모두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므리바와 맛사, 민수가 20장에 나오는 므리바와 맛사, 그 고난과 시험의 상황을 지혜롭고 슬기롭게 통과하지 못한 까닭에 있습니다. 사실 그날까지 무려 38년 동안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배도 곯지도 않았고, 목도 마르지도 않았으며, 광야의 뙤약볕과 밤마다 찾아오는 한기를 이길 구름구름과 불기둥이 그들을 둘러싸게 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고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또 그들을 인도한 모세와 아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므리바와 맛사의 다툼과 시험 앞에 자신들의 바닥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은 2천년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르지 않는 모습이었죠.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정치적인 자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메시아를 고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만큼은, 당신의 나라와 의를 먼저 내다보는 자들에게는 다 책임져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공중 나는 새를 보라면서,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면서,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 그들조차 먹이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굶주리게 하시겠느냐, 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너희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예수님이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고, 병자들을 고치고, 파도와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어도, 힘없이 체포당하는 그 모습 앞에, 그는 자신들이 바라는 메시아일 수가 없다면서,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분이 아니라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돌변한 그들 아니었습니까?

그것이 어찌 보면 3천5백년 전 모세를 향해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했 므리바와 맛사의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의 심령 속에서 움츠리고 있는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속에 머무르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지 않으면, 여전히 불평하고 원망하던 므리바와 맛사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또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지 않는다며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2년 전의 유대인들처럼, 오늘 우리들도 므리바와 맛사의 심령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이 무엇인지,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더 깊이 우리의 심령에 각인시켜야 합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의 것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은 영원한 생명이기에, 이 세상의 어떤 환경속에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 그것이 메마른 광야와 같을지라도, 그곳이 음침한 골짜기와 같을지라도, 모든 순간순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 그것이 복음이자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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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br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br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br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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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처한 곳이 모진 므리바이거나 혹은 맛사의 현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여태껏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주님을 붙잡고 영생을 취해 오셨다면, 앞으로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더욱더 실실하게 붙잡고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곧 영생을 취한 자의 올바른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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