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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귀를 지으신 이가(시94:1-23)

by 똑똑이채널 2022.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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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산상수훈 설교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말은 멋있을지 몰라도 실천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내 말을 무시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들 앞에서 내게 모욕을 주는 사람은 용서하기가 어렵죠. 십 만원을 빌려가서 갚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기는 쉬워도 천 만 원을 빌려가서 도망 간 사람은 용서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언젠가 시골에 갔을 때 옆 동네에 사는 후배 하나가 그런 이야기를 제게 들려 준 적이 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던 이웃 집 어머니가, 이제 서울로 이사를 간다면서, 자기 아버지에게 그 집을 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을 천만원 주고 샀는데, 그 무렵 자기 아버지가 죽고, 그 집 주인 어머니는 서울로 이사를 간 것입니다. 그랬는데, 이제 그 집을 이전해 달라고 연락을 했고, 인감증명서를 떼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 어머니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어머니는 다니던 교회의 권사님이셨습니다. 왜 인감증명서를 떼 주지 않았을까? 아직도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데, 지금은 전화통화도 안 되는 실정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런 분을 용서하기가 쉽겠는가, 우리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몇 년 전에 주일산악회를 떠나기 위해 출발한 버스가 경부고속도로 회덕분기점에서 교통사고가 났고, 그 사고로 4명이 죽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의 주범이 될지도 모르는 흰색 승용차가 그 차에 끼어든 게 발견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 흰색 승용차가 주범이라면, 다들 그 차량 운전자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처럼 우리들을 어마어마한 고통에 빠트린 사람들을,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사랑할 수 있겠는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있잖습니까?

 

오늘 읽은 시편 94편의 고백에는 그 누구도 여태껏 사용한 적이 없고, 표현한 적이 없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하고 부르짖습니다. 그가 당한 고통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억울했으면 하나님을 향해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겠습니까? 마치 무법천지의 세상이 온 듯이 악인이 도처에 날뛰고, 주의 백성들을 마구 짓밟고,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과부, 고아, 나그네를 살상하는 극악무도한 짓을 벌건 대낮에 저지르는 모습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나, 감당하기 버거운 고난이 쓰나미처럼 몰아닥칠 때 우리는 과연 당황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안하고 있다고, 아무 것도 못 보고 있다고 말하는, 악인들의 소리에 휩쓸려야 하겠습니까? “거 보십시오. 하나님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무관심한 분이 맞지 않습니까?”라고 이야기할 때, 그들의 뜻에 동의해야 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죠. 차라리 시인처럼,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복수해 주십시오. 내 원수들에게 제발 복수 좀 해주십시오.”하고 호소하는 게 더 나은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호소할 때, 당장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내 판단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당신의 섭리 안에서 가장 선한 것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예상치 못한 때에, 기가 막힌 신비로 우리를 위해 일하심을 믿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9-10절에서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하나님은 악인들의 악을 다 헤아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선인들의 선한 행위도, 영원한 것을 건져 올린 것도 영원의 축적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다 헤아리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게 참된 믿음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들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하나님은 가장 강퍅한 사람의 대응자입니다. 바로 애굽의 바로를 굴복시키신 분 말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린 분이시고,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려, 포로로 끌려간 유대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래서 폭 32km의 홍해를 가르셨고, 광야 40년 동안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수르 대군 18만 5천명이 처들어왔을 때, 이사야의 조언을 받은 히스기야가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간절히 무릎을 꿇고 간구했을 때, 그 날 밤 그 앗수르 대군 18만 5천명을 송장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원수와 같은 이들에게 고난을 겪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외롭게 내버려두는 분이 아닙니다. 친히 당신의 품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복수하시는 하나님, 복수하는 하나님, 하고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결코 모르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꿰뚫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나서야 하실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지금 내가 지금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해서, 상대편을 향해 저주하고 악담을 퍼붓는다면, 그것이 어찌 하나님 앞에 상급이 되겠습니까? 그런 모습이라면, 자신이 당하는 고난으로 인해 어찌 의의 씨앗을 심는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런 때일수록 그리스도인 취해야 할 자세는 분명해집니다.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할 뿐, 사람에게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선으로 악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그런 자세로 임하면 하나님께서 상급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총을 체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게 되는가?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먼저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 자신의 심령을 되돌아보게 하시는 방편이 되게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의인이 악에 빠진 경우, 그를 바르게 세우시는 차원에서 당신의 인생 막대기로 회초리를 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12절에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하고 고백하는 것이죠. 내가 겪는 고난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께서 컨트롤하시려는 깊으신 뜻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 말입니다. 그런 심령이 될 때 주의 신비로운 역사가 그를 감싸는 것을 느끼게 될 수 있는 법이죠.

그와 같은 일을 겪는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입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 요셉이 고백하죠.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만약 요셉이 종살이하고 옥살하는 과정에서 형들을 욕하고 저주하는 삶으로 일관했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부어주셨겠습니까? 요셉은 그런 관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자신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 과정이 내게 필요하심을 아시기 때문에 나를 이런 상황으로 인도하셨을 받아들인 것이죠. 그때 그 기간 동안 연단받은 요셉은 하나님의 기간이 되었을 때, 국무총리로 나라를 이끌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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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렇기에, 우리들도, 인생의 고비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감당하기 힘든 괴로움이 찾아와도 피하거나 다른 사람의 핑계를 돌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의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고난은 우리를 성숙케 하려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으로 받아들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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