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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자의 인격과 존재 그리고 존엄성을 나타냅니다.
제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이름을 통해 드러난 그 사람의 이미지가 그려지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만큼 그의 이름은 그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마찬가지죠.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하고 대답해주셨습니다.
그 뜻이 히브리어 ‘야훼’ 곧 ‘여호와’인 셈입니다.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누군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물을 때,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했을까요?
본래 하나님은 이름은 없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이름이 존재한다면 인간에 의해 규정당하거나 제한당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에 의해서 규정당하거나 제한당하는 분이 아니죠.
만일 그 어떤 인간이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한다면 그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모세가 하나님께 재차 묻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다”하고 대답해주셨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껏 그 백성들과 함께 존재하신 분이었다는 걸 천명한 거죠.
바로 그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명해주돌고 모세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다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보고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라고 수식한 말들이 있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 양을 준비해주신 하나님을 만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곧 예비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죠.
아브라함이 99세 하나님께서 나타나 내년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이다 하면서 ‘나는 전능자라’하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 있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를 행진할 때 아말렉과 전투를 벌여 승리할 때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죠.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과 싸우기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데 그때 하나님의 천사를 보고서도 죽지 않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을 향해 ‘여호와 샬롬’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죠.
그 외에도 ‘여호와 닛시’, ‘여호와 라아’, ‘여호와 삼마’, ‘엘 로이’ 등 하나님을 경험한 이들이 붙인 이름들이 많습니다.
그 ‘야훼’, 그 ‘여호와’ 곧 스스로 계신 ‘자존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고자 하신 적이 있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뒤에 르비딤에 당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다고 할 때였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생수를 마시도록 했고, 모세는 그대로 순종해서 백성들이 물을 마실 수 있었죠.
그런데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체결하고 출애굽한지 2년째에 성막을 만들고, 이제 광야행진 38년째 되던 해였죠.
그때는 애굽에서 나온지 40년째 되던 해요 가나안 땅을 건널 수 있는 요단강 앞 므리바에 당도한 상황이었죠.
그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반석을 향해 명령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물을 직접 내실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모세는 반석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 않고 자신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씩이나 치고 말았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2)
(깨달음)모세는 바로 그 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죠.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달려 있다는 것이죠.
왜 그때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채 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쳤던 것일까요?
그것도 두 번에 걸쳐서 말입니다.
구약성경의 미드라쉬 같은 유대전승들을 보면 그때의 상황을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모세는 자기 여동생 미라암의 죽음으로 슬픔에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 ‘너는 반석을 향해 내 말을 대언해라’, ‘반석을 향해 명령하면 된다’하고 말씀한 것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명령을 해도 물이 곧장 나오지 않고, 백성들은 불평하면서 예전처럼 반석을 치기를 바라는 것이었죠.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물을 내신 것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죠.
그래서 예전처럼 반석을 한 번 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때 물이 졸졸졸 나오자, 자기 분노와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고자, 반석을 향해 지팡이를 들고 한 번 내리쳤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지 못한 것이었다고, 모세의 자기 자아를 드러낸 일이었다고, 평가한 것이었죠.
그로 인해 “너는 여기까지다”,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하고 말씀하셨던 것이죠.
(적용)어떻습니까?
우리 자신도 ‘야훼’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 ‘자존자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한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허리가 아플 때 나를 고쳐주신 하나님, 곧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말입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해 하늘이 놀놀할 때 그때 나를 지켜보시며 살펴주신 하나님, 곧 ‘브엘라해로이의 하나님’ 말이죠.
내가 막다른 상황에 직면할 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새 길을 준비하신 하나님, 곧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말이죠.
과연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그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체험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삶과 직결돼 있다는 점이죠.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이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예배나 찬양을 부를 때 ‘하나님께 박수로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드러나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낼 때 그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예수님께서 12제자 곧 12사도에게 당신의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를 알려주기를 요청한 까닭에 주님께서 새로운 기도 곧 성숙한 기도가 무엇인지 알려주셨죠.
더욱이 그 당시 유대사회의 랍비들의 제자나 이방 종교인들의 기도가 주님의 뜻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새롭게 알려주셨죠.
이른바 큰 길이나 회당 앞에서 큰 소리로 떠벌리듯 자기 자랑 자기 과시를 드러내는 기도를 하는 모습들 때문에 말이죠.
더욱이 앵무새처럼 기도한 내용을 또 하고 또 하는 모습 곧 중언부언하는 모습들 때문에 주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알려주셨죠.
그렇다고 큰 소리로 기도하지 말라거나 대표기도를 하지 말라거나 오직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죠.
너희들이 기도할 때 너희들을 중심에 놓고 기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기도하라는 뜻으로 알려주신 거죠.
그리고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의미도 기도한 내용을 자꾸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며 기도하라는 뜻이었죠.
바로 그런 기도를 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숙한 기도가 어떤 것인지 일깨워주기 위해 주님의기도를 새롭게 알려주신 거였죠.
그래서 맨 처음 하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였죠.
헬라어 원문은 ‘아버지’라는 팔이 맨 처음 나온다고 했죠.
그만큼 너희들이 하는 기도의 대상자가 ‘영적인 아버지’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된 영을 받은 너희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임’을 알라는 것이었죠.
더욱이 “하늘에 계신”이란 말도 헬라어 원어는 ‘하늘들에 계신’ 아버지라고 했죠.
그것은 이 땅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늘에만 계신 아버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늘들에 계신’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곳에 편만하게 계신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죠.
그만큼 들꽃 송이 하나 속에서도, 모래알 하나 속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굶주림 속에 울고 있는 아이의 눈 속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름철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의 검게 타오른 얼굴과 땀방울을 통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평생 자식 뒷바라지하다 나이가 들어 손가락이 휘어버린 부모님의 손가락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희게 변해버린 노인들의 머리카락 속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 말이죠.
바로 그것이 내 삶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의 기도라는 점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우리 기도의 대상자이신 하나님께 첫 번째 기도해야 하는 내용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9절 하반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원해)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하늘들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면서, 첫 번째 기도내용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Hallowed be your name)하고 기도하라고 말이죠.
(깨달음) 하나님의 이름은 서두에서 이미 생각해 봤습니다.
‘야훼’ 곧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존자’ 곧 ‘스스로 있는 분’이란 뜻이라고 말이죠.
‘엘’은 ‘신’들을 뜻하는 말이죠.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이 특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본래부터 존재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기도 하고, 누군가에는 예비하신 하나님으로 다가오시죠.
또 누군가에겐 치료하는 하나님으로, 누군가에게는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누군가에겐 앞서가시는 하나님으로 만나주시죠.
(원성)예수님의 이름도 마찬가지죠.
예수님의 이름에는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또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2:9-10)
예수님의 이름은 권세와 표적과 능력이 나타나는 이름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적용)예수님의 이름은 그렇듯 구원하는 능력의 이름이고, 모두 무릎을 꿇게 하는 이름이고, 기사와 표적과 능력이 나타나는 이름이죠.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그런 은혜와 역사가 나타나는 이름입니까?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스게와 제사장의 7 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죠.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적 양자가 되지 못한 자였기 때문이죠.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 맺은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자존자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이신줄,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심을, 하나님은 자존자이심을 너는 믿느냐?”
“그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전능자로 나타나주시길 원하고, 예비하신 하나님으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나주길 원하지 않겠느냐?”
“그 하나님께서는 너의 어려움과 고난을 살피시는 브엘라헤로이의 하나님으로 너를 감싸주지 않겠느냐?”
“그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영적인 양자된 자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예수님의 이름에도 구원의 능력이 있고, 병든 자가 고침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시는데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더냐?”
“스게와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고자 흉내냈지만 불가능하지 않았더냐?”
“하나님은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와 사랑을 베풀어주길 원하지만 하나님과 관계 맺은 자들 아니겠느냐?”
“하나님께 자기 주권을 내어맡기며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고백하며 관계맺은 자들에게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과 진실된 관계를 맺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전능자 하나님으로, 승리의 하나님으로, 치료의 하나님으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지 않겠느냐?”
(찬양)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 드립니다 주의 나라 찬양 속에 임하시니 능력의 주께 찬송하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언제나 동일하신 주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영원히 다스리네
나 주의 이름 높이리 나 주의 이름 높이리 하늘 높이 올린 깃발처럼 주의 이름 높이리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언제나 동일하신 주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영원히 다스리네
(전개)하나님은 아빠 아버지로 고백하며 진실된 관계를 맺은 자들에게 지금도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오며”하라고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원해)여기에서 ‘거룩하게 하다’는 헬라어 ‘하기아조’(ἁγιάζω)는 ‘구별하게 하다’, ‘성별하다’, ‘죄를 씻다’는 뜻입니다.
‘거룩하게 하다’는 것은 구별되다는 뜻이요, 성별하다는 의미입니다.
애굽에서 살지만 애굽의 백성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이 구별된 삶이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만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이방 신들을 섬기는 삶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를 좇는 삶의 방식이 구별된 삶입니다.
(깨달음)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오며’할 때 그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죠.
하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거룩하게 하시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에게 불을 내려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받으시는 것이죠.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을 민족들이 알리라 하라”(겔39:7)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받으신다는 거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과 관계맺고 살아가는 자녀들의 구별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영광받으신다는 거죠.
(예화)그런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폴레옹 휘하에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가 있었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병사는 탈영하다가 잡혀왔습니다.
나폴레옹이 순시차 막사에 들렀다가 탈영하다가 잡힌 그 나폴레옹 병사를 보고 한 말이 유명하죠.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말이죠.
그때 “네, 제 이름은 나폴레옹입니다.”하고 대답을 했죠.
그때 나폴레옹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죠.
“네 이름이 나폴레옹이면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아니면 네 행동을 바꾸도록 해라.”
“네 이름 때문에 내 이름이 욕될까 한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는 삶 속에 달려 있다는 것이죠.
‘모세야 반석을 쳐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신 것처럼 말이죠.
‘모세야 반석을 향해 물을 내라고 명령해라’할 때 그때도 순종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셨겠죠.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는 것은 그 자녀들의 삶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병사의 이름을 바꾸든지, 그 행동을 바꾸든지, 하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죠.
(적용)대부분의 대형교회에서 젊은이들이 찬양을 할 때 손을 들고 찬양을 합니다.
그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실 것 같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을 것 같죠?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 속에는 “하나님, 제가 제 삶을 통해 영광드리길 원합니다”하는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찬양을 다 부른 후에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함께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드리겠습니다.”하고 박수를 치죠.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겠습니까?
아무리 뜨겁게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쳐드린다해도 그 삶이 구별된 삶이지 않으면 하나님은 영광받을 수가 없는 분이시죠.
(성화)우리가 수요일날 밤에 살펴본 말씀도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2차와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와서 나실인 정결례를 행한 이들과 함께 했죠.
그들을 삶에 공감하면서, 그들의 주안에서 얻고자 함이었죠.
그런데 그들과 공감하며 그들을 배려하며 동행하는데, 3차 전도여행때 에베소에서 만난 유대인들을 만나게 됐죠.
그때 그 유대인들은 바울이 율법을 무시한 자요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고 난동을 피웠죠.
그러자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이 달려들어 집단 폭행을 가하고 바울을 질질 끌고 갔죠.
그 모습을 바라본 로마 천부장 루시아가 군사들을 동원해 그 일을 제지하며 쇠고랑을 채웠죠.
그리고서 끌고 가려는데 유대인들이 더 폭행을 가해 바울이 급기야 쓰러지고 말았죠.
그때 바울은 층계로 들려 가는데 루시아 천부장에게 말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말을 하게 되죠.
그때 바울은 히브리 말로 그 유대인들을 향해 말을 했죠.
자신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폭행을 가한 그들에게 히브리말로 복음을 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요, 그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조롱받고 매맞는 것을 넘어 그들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공감하는 차원에서 히브리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는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죠.
(깨달음)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는 것은 내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데 있다는 거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는 것은 나와 관계 맺고 사는 이들을 공감하는데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누군가 기쁜 일을 맞이했을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며 배려하는 마음과 자세 말이죠.
바울이 자신을 조롱하고 폭행을 가한 그들의 연약함과 무지를 배려하고 공감하기 위해 히브리말로 복음을 전한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내음성)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는 것은 제 삶에 달려 있었네요.”
“아무리 기도하고 찬양하고 박수를 친다고 해도 제 삶이 형편없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한 것이었어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는 것은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하는데 달려 있었네요.”
“누군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누군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바울이 자신을 헐뜯고 비방하고 구타하는 그들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공감하고 배려하며 복음의 말을 했던 그 삶을 저도 본받게 해 주세요.”
“저도 연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도록 제 삶을 구별되게 살게 해 주세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찬양)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길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 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요 오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설교닫기)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전능자요, 치료자요, 예비자요, 구원자의 이름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드릴 때 그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받으시도록 기도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에 달려 있습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을 공감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십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 전능자의 하나님, 치료자의 하나님,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는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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