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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이야기로 알려진 누가복음15장에 아버지와 두 아들 이야기를 기억해보면 좋겠습니다. 한 부모에게서 난 두 아들이지만, 그들의 생김새와 삶의 방식은 전혀 달랐죠.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함으로 아버지의 살림을 탕진하죠. 그와 반대로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옆을 지키며 성실한 삶을 삽니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말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어느 부모라도, 둘째 아들과 같이 아버지의 살림을 탕진하며 살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바른 아들의 삶이 첫째 아들의 삶과 같다고 말하려 할 때, 사실은 조금 더 귀를 기울이라 말씀합니다. 성경은 첫째 아들과 같은 삶이 좋은 삶이고, 둘째 아들과 같은 삶은 나쁜 삶이라고 단언하지 않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태도와 자세 때문이기도 하죠. 아버지는 자신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둘째 아들’(눅15:30)이 돌아오자 살진 송아지를 잡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곧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한량없는 사랑에 ‘삼킴'을 당한 꼴이죠. 아버지의 사랑에 둘째 아들이 녹아내린 꼴 말입니다. 그만큼 한량없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둘째 아들의 삶은 복원이 되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새롭게 더 깊어진 관계가 된 것이죠. 그만큼 아버지의 사랑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길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고, 또 살아갈 새 힘을 공급하시는 분이시죠.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올곧은 삶을 살고자 애썼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율법을 넘나드는 예수님은 불편한 존재가 되었죠. 그래서 예수를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오지 않았습니까? 신명기 율법은 간음한 자를 돌로 쳐 죽여도 좋다고 말씀하죠. 바로 그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이죠. 그래서 그 여자를 돌로 쳐 죽일 것을 그들이 요구하고,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해 주기를 고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하고 말씀하셨죠. 그 말씀으로 인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둘러싸고 으르렁 거리던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갔죠. 우리가 십계명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데, 십계명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할 게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을 문자주의자로 받아들이기보다, 문자 너머의 그 정신과 본질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 또 십계명은 일방적인 계명이 아니라 상호쌍방의 계명이라는 점이었죠. 그래서 그 쌍방의 관점에서 볼 때,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온 남성들은 모두 그 여인만을 죄악된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도 거기에 쏠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십계명이 상호쌍방의 계명임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치라는, 그 말씀을 하셨던 것이죠. 너희들은 다 간음한 현장의 여인만을 문제삼괴, 다들 정죄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이더냐,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에게는 아무런 잣대도 들이대지 않는 너희들의 시선은 과연 온전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자라로 말할 수 있겠느냐, 하고 질타하셨던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그들 모두는 돌을 놓고 달아났죠. 그 자리에 이제 여자와 예수님만이 남았습니다. 그때 그 여인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 하셨죠. 그만큼 예수님의 한량없는 사랑에 그녀가 둘러싸인 것입니다. 한량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둘째 아들의 삶이 다시금 복원이 된 것처럼, 주님의 그 따뜻한 사랑에 둘러싸인 그녀의 삶도 다시금 복원이 된 것이죠.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은 그처럼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죄 많은 인생들을 오늘도 구원하시고, 은총을 베푸셔서 새로운 길을 걷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87편은 무척 짧습니다. 역시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들 고라 자손들이 과연 이 시편을 통해 무엇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곧 ‘시온’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시온주의의 시입니다. 시온은 곧 예루살렘의 다른 명칭이고, 곧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나라를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시편의 시온을 복원하고, 나라를 되찾고 나라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시온주의’를 결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 그 시온과 대척점에 있는 나라와 열강들을 보여주고 있고, 그런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래도 이스라엘 나라가 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때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이방 나라의 심판 속에서 나라를 잃고, 고국 산천을 잃은 그 이스라엘이 다시금 복원되고 나라의 독립을 가져올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4절에 ‘라합’은 각주에서 밝혀주듯이 애굽을 가리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탈출의 대상이었죠. 이스라엘은 그 출애굽 여정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고, 깨달았고,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죠. 또 4절에 등장하는 ‘바벨론’은 어떤 나라입니까? 메소포타미아의 열강들을 대표하는 나라죠.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성전을 훼파하며, 백성을 포로로 삼았던 나라였죠. 또 4절 하반절에 있는 ‘블레셋’과 ‘두로’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근처에 위치한 작은 강대국으로 이스라엘과 역사 속 갈등이 끊임없던 나라였죠. 그리고 ‘구스’는 어떤 나라입니까? 먼 이방 민족들을 대표하는 나라죠. 그들 모든 나라들이 이방 나라로서, 이스라엘에 적대국이었죠. 그런 적국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내시고, 포로에서 귀환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상기키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표현이 있습니다. 본문 4-5절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고,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가 시온에서 났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저밉니다.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그런 이방인들에게도 근원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세상 모두가 구원받는 백성이 되길 원하신다는 것이죠.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의 침략을 받고, 또 그 속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오게 하시고, 역사의 흥망성쇄를 겪게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만 선민이 아니라, 이방 나라들조차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함임 알 수 있죠. 이스라엘에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방 나라 이방 백성들이 보고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면 그들에게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실은 모든 나라 모든 백성이 시온의 백성, 곧 하나님의 도성의 백성이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총 속에서 둘째 아들이 다시금 길을 찾은 것처럼, 그 사랑 앞에서 간음한 여인이 새 길을 되찾은 것처럼, 그 긍휼 속에서 이방 나라 이방 백성들조차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 사랑안에 충만하게 녹아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 주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크신 위로와 격려 속에서 새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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