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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누리는 복에 대해 노래한 찬양시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저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그래서 성전을 그리워하면서 이 시를 쓴 것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고라 자손 중에 경건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표제를 보면 “고라 자손의 시”라고 돼 있습니다. 이 ‘고라’는 레위 자손이고, 고핫의 손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민수기 16장을 보면 고라는 다단과 아비람과 함께 모의해서 모세와 아론에게 도전장을 내민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을 꾀했습니까? 고라는 같은 레위 지파의 후손인데, 아론이 대제사장직에 발탁된 것, 그리고 엘리사반이 고핫 자손의 족장으로 임명한 것(민3:30)에 대해 몹시 싫어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같은 레위 지파의 자손으로서 왜 자신은 지도자의 반열에 세워주지 않느냐, 하고 따졌던 것이고, 그런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자, 다른 지파의 자손인 다단과 아비람을 부추겨 함께 반역을 꾀했던 것이죠.
고라와 함께 그 반역에 함께 공모한 다단과 아비람이 누구인가? 다단과 아비람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 지파의 두령들 곧 지도자들에 속한 인물들입니다. 그들도 실은 모세와 아론에게 쌓인 게 많았다고 할 수 있죠. 사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 아닙니까? 그런데도 광야 행진과 진열을 갖출 때 누가 가장 돋보이는 진을 쳤습니까? 르우벤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였죠. 그 까닭에 장자였지만, 유다에게 뒤쳐진 르우벤 지파의 그 두령들, 곧 다단과 아비람이 고라와 함께 주동하여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을 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고핫 자손 중에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게 하신 분이 누구였는지 말입니다. 더 나아가 광야 40년간의 행진 대열 가운데 가장 선두 그룹으로 유다 지파를 세우게 하신 분이 누구였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 모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무슨 의견을 내세우면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습니까? 자신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고 있다는 것,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명예를 취하고 있다는 것, 그 두 가지 것을 내세워 모세와 아론을 헐뜯었고, 그들의 지도력에 반기를 든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그들과 동조한 250명의 사람들이 다음날 아침에 지진에 의해 다 몰살당하고 말았죠.
그렇다면 그 자손들까지도 다 죽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표제는 “고라 자손의 시”라고 돼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 가운데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함께 한 250명의 무리를 다 심판하셨지만, 그 진노 가운데서도 고라의 아들들만큼은 그 심판에서 벗어나 그들의 후대를 생각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명예를 안고 살았던 고라의 자손들, 그때 당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가운데 살아났지만, 불명예를 안고 살게 된 고라의 자손들은 그때 이후 다윗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레위 자손 중에서 더욱더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 그들의 헌신과 섬김과 봉사정신을 높이 바라봤던 다윗은 그들 고라 자손을 들어 레위 자손 중에 가장 유명한 지파로 쓰임받게 해 주었죠. 그리고 그런 은덕을 입은 고라 자손들은 다윗이 압살롬의 쿠데타로 인해 피난 길에 오를 때,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다윗을 보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의 저작 배경을 다들 다윗의 시대라고 이야기 하죠. 더 구체적으로는 그 다윗이 피난 길에 올랐을 때 고라 자손들도 다윗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을 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성소를 떠나 있지만, 다시금 그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간절히 간구하는 그런 자세로 이 시를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 지금, 고라의 자손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성소, 곧 하나님의 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까닭에 그 자손들은 본문 10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고 말이죠. ‘악한 자의 집에서 천 날 동안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전에서 한 날을 보낼지라도 그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그런 고백입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들 자손들은 그런 간구로만 끝내지 않습니다. 본문 2절에서는 이런 마음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하고 말이죠. 그 자손들은 예전에 하나님의 성소를 섬기던 그 때를 그리워하면서, 자신들의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쇠약해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다가 ‘상사병’에 걸린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만큼 그 피난길에서 그들은 멀리 예루살렘, 곧 시온에 있는 성소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모습입니다.
왜 그들이 그만큼 하나님의 성소를 사모하고 애달파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건한 자들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죠. 참된 안식과 평안은 힘과 권력으로부터 주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자손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의 성소에 거하는 자들은, 성소에 들어가 마음껏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아마도 그 전 곧 지금의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는, 그 성소에서 일할 때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게 너무나도 그립고 애달파하게 됐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주게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시온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 결과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에 세 번씩 곧 무교절, 칠칠절, 그리고 장막절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신들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1년에 세 차례나 그 성소 곧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자신들의 모습을 보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자신들이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그 모든 일정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죠. 그만큼 모든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지 않으면 결코 그렇게 나아갈 수 없죠. 바꿔 말해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지니는 것조차도 실은 주께 힘을 얻을 때에만, 진정한 복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만 그렇게 한다는 것이죠. 그런 모습은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가 주일날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합니까? 어떤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기도를 드립니까?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요 평안임을 아는 자만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죠.
더욱이 고라 자손들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라면, 죄와 사망에 의해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임을 안다면, 더더욱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드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을 수 있죠.
오늘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도, 세상에서의 천 날보다도, 세상에서의 가장 크고 화려하고 능력 있는 것보다도 오직 주님 안에서의 한 날,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을 찾고 의지할 수 있는 그 날이 가장 복된 날임을 잊지 않는 하루하루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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