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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은 ‘아삽의 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불의한 재판장에 의해 사회 정의가 무너질 때, 아삽이 불의한 재판장들의 비양심적인 행위를 규탄하고, 이스라엘을 공평과 정직의 터 위에 견고히 세우도록, 절대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선포하는 지혜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하나님께서 신들의 모임 가운데 서서 그들을 재판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여기에서 ‘신들’이라는 표현은 ‘재판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단어는 ‘엘로힘’과 동일한 단어이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죠.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본문의 신들, 즉 재판장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해서 백성들을 심판하는 당시의 통치자들을 의미한비다. 이른바 신들을 곧 당신의 천사들로 혹은 당신의 백성 중 지도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왕이나 통치자를 대개 신의 대리자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공평으로 판단하며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힘써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공정한 재판장이 되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1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재판장들 가운데 서 계시다고 증거하는데, 성경에 나타나는 왕이나 재판장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모세는 앉아서 판결하였다고 출애굽기 18장 13절에 증언합니다. 또한 여선지자요 여자 사사인 드보라도 이스라엘을 재판할 때에 종려나무 아래 앉아서 재판했다고 사사기 4장 5절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서 계시다는 것은 세상의 불의하고 패역한 재판관들을 향해 심판을 단행하시는 듯한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어서 계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비호하고 약한 자들을 억누르는 이들의 불공평한 재판을 질책하고 계십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겠느냐고 질책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주 오래도록 불의한 재판장들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2절에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하고 고백하죠. 이른바 주님께서는 언제까지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악인들 편에서 재판을 하겠느냐고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불의한 재판장들의 이런 행동은 단순한 불충성의 의미를 넘어서는 행위입니다.
그들 자신들을 재판자로 세우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적인 행위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을 불의와 부정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죠. 더 나아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하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패역한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장들이 불의한 재판을 하게 된 동기는 정의보다 자신들의 이득을 도모하기 위함이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악인들의 이익을 눈 감아 주는 행위를 자행하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악한 재판이 거듭거듭 되풀이 되는 것이죠.
지난 정권 때 언론에 붉어졌던 ‘미르 문화재단-K스포츠재단’의 1000억대 모금도 일종의 그런 모습과 연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국경제실업연합회’로부터 그 문화재단이 어마어마한 돈을 모을 수 있는 것도, 또 그런 배후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도 실은 모두가 자신들의 배를 배불릴 수 있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이 서로 연결고리로 얽혀 있는 까닭이죠.
그러나 그게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 보이지 않는 지하 경제가 엄청나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견만리’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미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고, 이미 우리나라 진출을 앞두고 있는 ‘알리페이’같은 것도, 우리나라에서 실용화되기가 쉽지 않다는 측면도 제기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물건을 사고 파는 결제 수단을 예전에는 엽전으로, 그 뒤에는 화폐로, 지금은 온라인 결제로 다 처리해왔는데, 앞으로는 알리페이 같은 다른 결제수단을 동원해 결제하기 때문에, 지하 경제가 그만큼 축소된다는 뜻이죠. 명견만리라는 프로그램에서는 과연 우리나라가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될지 미지수라고 한 이유도, 부패고리와 연결돼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반영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사법부나 입법부나 행정부도 모두가 믿지 못하는 총체적인 난국에 처해 있는 현실이죠. 그만큼 불공정한 사건을 바르게 판결해야 할 위치에 서 있는 자들이 그런 엉뚱한 모습을 저지르고 있으니, 얼마나 통탄해 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3-5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를 선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당시 공동체에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대접을 받기 쉬운 계층이었습니다. 3절에 등장하는 ‘가난한 자’는 단지 경제적인 가난함에 처한 자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도움을 받을 곳 없이, 철저하게 힘이 없는 연약한 자를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참된 재판장들을 세우신 목적은, 그들처럼 약하고 억울한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익을 되찾게 하는데 있다는 점입니다. 이 땅의 재판장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억울한 자들을 돌보고 억울한 이들의 판결을 바르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억울한 사람들을 더욱 억울하게 하는 일을 행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사회적으로 힘든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흐름상 당연한 관점이죠. 하지만 언젠가도 말씀을 드린 바 있듯이, 사회적인 지위나 많은 재물이나 권세를 지니고 있는 자들도 그 심령이 약한 자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회사의 오너나, 기업의 CEO들도 나름대로 고민과 고충이 우리말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회사를 더욱 바르게 이끌어 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직원들의 월급을 밀리지 않고 제 때에 채워 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기업을 더욱 크게 성장시킬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불철주야 고민하고 열심히 뛰죠. 하지만 그런 강인한 심령들조차도 때로는 정말로 허물어지기 쉬운 마음의 연약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더욱더 신실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어찌됐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당신의 대리인과 같은 재판장과 지도자들을 세우고 계십니다. 각계각층에서 말이죠. 그들을 향해 신들, 곧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해 공의를 행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위치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모습에 더욱더 부응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우리 자신들도 주어진 삶의 위치에서 나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 나보다 눌린 사람, 나보다 압제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향해 주님과 시선으로 바라보며 먼저 손 내을 밀어야 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가진 권세가 많을지라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위해서도 주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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