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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83편은 원수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진지한 대답을 하는 시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하고 밝혀주죠. 하나님의 것을 그들이 모두 소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보여줬다는 것이죠. 그런 원수의 모습을 3절에선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또 4절 후반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그리고 5절에서는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행위를 일삼고 서로 모의하고 간계를 꾀하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과연 누구인가? 6-8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대적자들 곧 에돔과 모압 아말렉 블레셋이죠. 그래서 9-11절은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심판을 언급하죠.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소서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그들의 귀인들이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미디안에게 행하신 일이란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가 1만2천의 미디안 대군을 물리치게 하신 사건입니다.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셨다는 것은 가나안의 왕 시스라와 야빈이 20년 넘게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압제했는데, 여선지자 드보라와 군대장관 바락이 그들을 맞서 전투태세를 갖췄을 때, 철병거 900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그들을 하나님께서 천군과 천사를 통해 완전히 물리친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라는 것도, 미디안 대군의 두 방백이 바로 그들인데,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가 하나님의 은총 가우데 그들을 물리친 사건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원수 같은 이들을 물리쳐주심을 증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13-17절을 통해, 또 다시 그런 원수 같은 자들이 쳐들어오거나, 당신의 자녀들을 힘들게 할 때, 어지러움에 빠트리고 간계를 부려 괴롭힐 때에, 그런 자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결코 다르지 않게 드리는 기도일 것입니다. 누군가 내게 악을 행하거나 정말로 원수처럼 미운 짓을 했을 때, 나를 이간질시키고, 내게 모욕을 주고,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을 때, 그런 원수 같은 이들을 하나님께서 하루빨리 멸망케 해 달라고 하는 기도 말입니다.
그것이 13-15절의 간구와 같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지극히 정상적인 기도 소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16-18절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그 원수같은 이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해 달라고 하는데, 웬걸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하고 간구하는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치를 당하여 놀라게 하시고, 멸망을 당하게 하셔서, 여호와 하나님만 온 세계의 지존자임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앞선 13-15절과는 이 마지막 부분이 뭔가 다른 느낌의 기도인 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앞에서는 완전히 몰아치는 폭풍과 같은 대대적인 전멸을 바라는 기도이고, 뒤에서는 그들 스스로 수치를 느끼게 하셔서 주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주님 앞에 돌아서기를 바라는 긍휼의 기도임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런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완전 멸하게 하시는 상태 속에서 원수 같은 이들이 돌아서게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관용의 마음을 품어서 원수 같은 이들이 돌아서게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청어람아카데미’의 양희송 대표가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라는 강좌를 진행했습니다. 양희송 대표는 관용을 설명하는데 두 명의 영화감독을 비교해 줬죠. 복수 시리즈(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와 같은 복수 시리즈 영화를 만들어 낸 박찬욱 감독, 그런가 하면 용서 시리즈(박하사탕, 밀양, 시)의 용서 시리즈 영화를 찍어 낸 이창동 감독을 소개한 것이었죠. 먼저,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을 통해 ‘복수’를 위해 응징을 하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 란 질문을 던졌습니다. 또 이창동 감독의 그 영화를 통해 ‘용서’는 진정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특별히 ‘밀양’ 같은 영화를 통해서는 종교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난관으로 작용하기도 하죠.
그런데 정말로 복수가 정의를 실현 할 수 있는가, 용서도 진정 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줍니다. 그러면서 양희송 대표는 중세시대에 있었던 ‘30년 전쟁’ 그야말로 나는 국가 기독교에 속한 이로서 모두가 맞는 것이고, 너는 기독교 국가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게 틀리다는 식으로 정죄하고 심판을 자행한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한 마디로 흑백논리로 자신과 세상 사람을, 기독교 국가에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국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모두가 다 사탄이고, 다른 종교를 갖는 것도 사탄으로 규정해 30년이란 흑역사를 연출했다는 것이죠. 거기에 과연 평화나, 용서가 드러날 수 있겠는가, 질문을 던지지만, 실은 그렇게 정죄와 복수가 난무하는 곳에는 함께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게 모두 맞는 말이지만, 내 신앙을 절대화하고, 내 신앙만을 백으로 생각한 채 다른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흑으로 간주하며 살아가면, 거기에는 참혹한 정죄와 심판과 대립만 생긴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흑이라고 믿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피조물로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 못하면 그 결과는 힘과 무력으로 누르고 협박해서 모두를 백으로 만들려는 생각만 넘치게 되죠. 그 대표적인 예가 십자군 전쟁이었고, 장로교의 창시자요 제네바 시를 기독교 국가교회로 만들고자 했던, 그래서 자신과 대립각을 세운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게 하고, 또 쇠꼬챙이로 혀를 찔렀던 존 칼빈이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정죄는 정죄를 낳고, 비난은 비난을 낳을 뿐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오지 않습니까? 집나간 둘째 아들이 다시금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 말입니다. 그 둘째 아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던 것, 그의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게 된 것은 아버지의 넉넉한 품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꿔 말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관용과 사랑으로 품어 준 아버지의 그 사랑 말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16절 말씀처럼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또 18절에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다시 말해 “원수가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관용과 사랑 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원수들을 다 없애지 않고, 함께 공존하며 사는 바탕이 되는 사회, 그것이 곧 관용의 사회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주님께로 그 악한 자들을 인도할 수 있는 첩경이자, 보다 확실한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도 내게 원수 같은 사람이 있을 때, 이 사회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인들이 있을 때, 그들을 모두 획일화시켜 정죄하고 심판하는 입장보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관용과 사랑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일흔 번에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기도 하고, 죄인 중의 괴수 같은 우리를 한 없이 품어주시고, 우리의 마비된 영혼을 흔들어 깨워주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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