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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언론에서 한강변에서 건져 올린 시체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른바 자살한 사람들의 시체가 그것이죠. 그들의 시신을 흰 천으로 덮어놓은 모습을 보게 되면, ‘인생이 얼마나 살기 힘들고 고달팠으면 저렇게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시편을 읽어보면, 그런 사람들의 심정과 다윗의 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운명이 원수들의 집요한 추격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했지만, 그 속에서 자살하지 않고 기도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극복하게 되죠.
그래서 본문의 말씀은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오직 유일한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본다면,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다윗은 고난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웠습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다윗은 큰 환난을 당해 고통스럽고 궁핍한 처지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의 종류는 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참으로 고통스럽다. 정말 싶다’고 할 정도, 그런 어려운 시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럽고 어려우면 이성을 잃고 극단을 선택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죠.
하지만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다 해도, 그때 극단을 선택할 게 아니라,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임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런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런 좌절과 절망 속에서 주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들이 주님의 위로를 받고 살아갈 힘을 얻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절망의 한 복판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처지가 정말로 가난하고 궁핍함을 시인하고, 그런 처지에 있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더욱더 간절히 의탁할 때, 위로자 되시고 격려자 되시는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새 힘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곤경 가운데서 부르짖을 때 귀를 막으시지 않으십니다. 고통이 너무 커서 세상의 것으로는 아무것도, 그 무엇도 도움이 될 수 없는 그런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친히 위로하시고, 새로운 힘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만큼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귀를 기울여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2절에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경건’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사람 또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함으로 그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만큼 순종하겠다는 뜻까지 함축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자들을 어찌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겠습니까?
4절입니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하고 고백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바라보는 보는 것이 변할 수 없는 마음과 자세로서, 오직 확정된 마음과 간절함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겠다는 표현입니다. 그것을 15절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주님은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다윗이 ‘우러러 본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그것이 실은 응답받는 기도이자, 효과적인 기도의 패턴임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정말로 효과적인 기도의 응답을 받고자 하는 가? 그렇다면 본문의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그분을 잘 알고, 그 분의 속성과 성품을 잘 헤아리고, 그 분을 우러러보면서 기도한다면, 그 분이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간구한다면, 친히 응답받을 수 있다는 것 말이죠.
본문 5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죄하시기를 즐거워하시고, 인자하심이 후하시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속성을 고백함으로, 이런 속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에 근거해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1절에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여기에서 ‘경외하게'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두려워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단순히 공포감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영화로우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등, 여러 가지 속성을 함께 공경의 마음으로 묶어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해 거룩한 경외심을 갖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 땅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경외심을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적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매사에 자기 자신을 살피고, 바르고 의로운 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때때로 죄악을 범하고 유혹에 빠져드는 것이죠.
13절 말씀입니다.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히브리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 가운데는 사람이 죽으면 가는 세계를 ‘음부’, ‘스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보통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사후(死後)세계로서 지하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온 우주가 하늘과 땅, 땅 아래로 구성되었다고 믿었는데, 그중 음부가 이 땅 아래 세계라는 것이죠. 그들에게 있어서 음부는 지하 깊은 곳에 있으며(사57:9, 암9:2), 흑암한 곳이며(시143:3, 애3:6), 잊음 곧 망각의 땅(시88:12)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음부’는 흔히 높은 하늘과 대조된 곳으로 표현하고 있고, ‘음부’는 산 자의 세계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온전한 분리를 뜻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13절 말씀은 영혼을 죽음의 음부에서 건지셨다는 상징적인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혼을 마치 사망과도 같은 암울하고 고통스런 상황으로부터 건져내셨다는 뜻이죠.
17절에서는 “은총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은총의 표적이란 원수들이 보고 놀랄 만큼 크고 좋은 그 어떤 호의로운 것을 뜻하는 것이죠.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궁극적으로는 실질적인 구출을 뜻하기도 하죠. 어찌됐든 고난 가운데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입니다.
다윗은 그만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광야의 도망자 신세를 겪으면서도, 고난 가운데서도, 절망치 않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고난을 극복해 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자신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더욱 철저히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정말로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 하나님께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에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하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시편 58편 9절에서 그렇게 고백하죠.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하고 말이죠.
아무쪼록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시는 주님께, 우리의 영혼을 스올에서 건져주신 그 주님께,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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