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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인 시편 89편의 표제어는 ‘에스라인 에단의 마스길’이라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어느 지역을 두고 하는 말인지, 또 에단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을 토대로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죠. 에스라인 에단이란 이름은 열왕기상 4장 31절에 나오는데, 솔로몬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임을 표현하면서 “에스라인 에단보다 더 지혜롭다”하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그 지명과 이름이 나오죠. 또한 역대상 6장 44절에서는 레위의 15대손으로 나오며, 역대상 15장 19절에서는 ‘노래하는 자 헤만과 아삽과 에단은 놋제금을 크게 치는 자요’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오늘 본문인 시편 89편을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전예배용 시를 지은 것을 보면 ‘에단’이라는 사람이 성전의 찬양대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에단을 다윗 시대의 헤만과 아삽과 더불어 성전의 찬양대를 지휘했던 ‘여두둔’과 동일한 사람으로 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내용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핵심적인 단어가 있다면 ‘다윗’, ‘언약’, 그리고 ‘성실’을 떠올릴 수 있죠. 본문 1-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셨고 맺으신 그 언약을 성실히 지키시므로 그 사랑이 끝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여기에서 다윗의 자손들이,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다고 고백합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셔서 그 사랑을 거두지도, 그 성실하심을 폐하지도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사실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을지라도, 남유다 만큼은 다윗의 왕조를 잇고 있는 남유다만큼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갔을지라도, 70년이 되었을 때 다시금 포로귀환의 은혜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모두가 다윗과의 언약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의 언약, 더 거슬러 올라가면 노아의 언약을 생각할 수 있겠죠. 모두가 패역하고 죄악이 관영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 흐름의 고백들이 사실 1-37절까지 기록돼 있습니다. 본문 20-24절도 그렇죠.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여기에서 다윗과의 언약을 강조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까닭에 당신의 성실함과 인자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실수하고, 하나님 앞에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것, 그들이 선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그들이 잘 났거나 능력이 있거나 아름다운 행위를 한 것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임을 알 수 있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들, 영적인 이스라엘이 된 우리들도 때로 연약하여 실수하고 넘어지고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로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한 없는 긍휼하심, 하나님의 크신 인애와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37절까지 강조하고 있는 시입니다.
그런데 38절부터는 그 논조가 달라집니다. 이전까지는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고백이었다면, 38절부터는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왜 숨어 계시냐고 따지듯이 항변하고 있습니다. 38-41절에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이처럼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하고, 46절에서는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하나님이 숨어계신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고난에 처해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고 있다는 뜻이죠. 그러면서 다윗과 맺은 그 언약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이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시인의 고백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고난에 직면한 인간이라면 당연한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항변하는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인생의 고난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견디기 힘든 고난에 직면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치에 의해 수 백 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당하는 아픔을 겪었죠. 이슬람 코란에 기록된 율법에 따라 아직도 수많은 여성들이 인권이 유린당하는 상황 속에서 고통 받고 있죠. 우리나라에도 일제 강점기에 정신대와 같은 불의한 일에 희생된 분들이 있고, 현재도 그 일로 고통 속에 사는 분들도 있죠. 굳이 그런 거창한 고난이 아니더라도, 암에 걸려 힘겹게 치료를 받고 있는 분들도 있고, 어려서부터 고통에 처한 사람들도 있고, 20대나 30대의 젊은 사람이 질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어려움에 처한 경우도 있죠.
그런 아픔과 고통을 겪은 분들에게 무슨 위로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고통과 아픔을 당한 분들은 그렇게 하소연 할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신실하게 돌보신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렇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계시냐고 말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든지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힘이 되고 용기가 될 수 있는 그런 말로 위로해 주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도 분명 살아계시고, 지금도 함께 하시고, 보호해 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마음이 실은 본문의 시편 기자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우리의 마음 속에도 있는 게 사실이죠.
하지만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의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상황을 무 자르듯이, 한 가지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는 없는 법이죠. 그래서 그 상황에 직면해 있는 분들에게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죠. 그래서 때로 침묵하는 게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침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우리는 눈여겨 봐야 합니다. 자신이 고난받는 자에게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 말입니다. 그냥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있는 그대로 하소연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문제와 고난 앞에서 쉽게 대답하려는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너무 쉽게 해결하려는 성급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함을 깨닫게 되죠. 그래서 잠잠히 기다리는 인내를 배우고, 더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겸허함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들은, 현재 누군가 고난과 고통 중에 있다면, 너무 쉽게 대답하려는 성급함에 빠지지 않도록 했으면 합니다. 우는 자들로 함께 울어주는 게 맞지만, 그 또한 너무 성급하게 하기보다, 때로는 침묵함으로 함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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