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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시편은 제 4권에 해당하는 시편입니다. 제 1권은 1편—41편까지, 제2권은 시편42—72편까지, 제3권은 시편73—89편까지였죠. 제4편은 시편90—106편까지이고, 그리고 마지막 제5권은 시편107—150편까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1권과 2권과 3권이 포로기 이전의 시편이라는 점,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제 4권이 포로기의 시편이라는 점, 마지막 제 5권은 포로기 이후의 시편에 해당된다는 점입니다. 제 4권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오늘 시편 90편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안전한 거처로 삼아왔지만,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의 선고를 받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한 번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시편 90편은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인 1-2절은 ‘영원하신 하나님은 인류의 안전한 집이 되신다.’는 것, 둘째 부분인 3-10절까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고통받는 짧은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고, 마지막 셋째 부분은 11-17절까지로 ‘고통으로 가득한 주의 종을 삶을 회복시켜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90편은 그 내용이 참 논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1절과 2절에서는 주는 우리의 거처가 되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을 하죠. 그리고 3절부터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짧은지를 이야기하고 있죠. 그리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우리 인생이 그렇게 짧은 까닭은 인생의 죄악 때문에 받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정의하죠.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는 그렇지만 그런 우리들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이 시편 90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신앙적인 논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영원한 분깃임을 압니다. 그런 저희들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떠나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생명도 짧고 인생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진노가운데서도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원합니다.’하고 기도를 드리는 시편입니다. 그만큼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알고 있고, 그런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도 알고 있고, 그래서 인생이 수고와 슬픔 뿐임을 알고 있고, 그런 인생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날아가는 세월처럼 지나가는데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달라고 간구하는 시입니다.
이와 같은 본문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과연 이 시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본문의 첫 번째 부분은 우리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 말입니다. 쉽게 고백하고 동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분은 그렇게 쉽게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두 번째 내용에서 핵심적인 단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짧음입니다. 즉,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고, 짧다는 것이죠. 그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5절과 6절에서 ‘인생은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았다가 저녁에 시드는 풀 같다’고 말하죠. 9절에서는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 지나갔다고 고백합니다. 10절에서는 잘 아시는 내용처럼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팔십이라 해도 신속히 가고 날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내용이 실은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고 고백하죠. 과연 여기에도 쉽게 동의하십니까? 우리의 인생이 신속히 날아가 버렸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부모님들이나 연세가 지긋한 분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세월이 날아가 버린 것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나 대부분의 연세드신 분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런 경우와 같습니다. 새벽부터 밤 늦게 까지 다양한 일을 한 사람은 하루에 정말로 여러 가지 일을 했고, 또 그 중에 의미 있는 일도 했기 때문에 보람된 일을 보냈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새벽기도에 나왔다가 휴게소에서 밥을 먹고, 오전에 서울에 가서 일을 보고, 오후 무렵에 내려오는 길에 산속 계곡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고, 그리고 저녁에 내려와서는 바비큐를 해 먹고 밤에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잠자리에 들었다면, 그 사람은 그 하루 동안에 정말로 여러 가지 일을 했고, 또 뜻 깊은 일들을 한 것이죠.
그런데 만약 아침에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해서 배가 고프면 라면 끓여먹고 밤늦게까지 텔레비전보다가, 졸려서 자는 삶을 반복적으로 계속 살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의 기억 속에는 몇 날 며칠의 일도 실은 하루와 같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시간이라는 것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지만, 절대로 같은 양, 같은 시간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어떻게 의미 있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전적으로 그 길이와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금방 날아간 세월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진정으로 의미있는 세월이 되기도 하는 것이죠. 동일하게 60년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그것이 짧고 신속히 지나갔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주 긴 인생을 살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창세기 47장에 나오는 야곱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애굽의 바로 앞에 섰을 때, 자기 인생에 대해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창세기 47장9절에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하고 말이죠. 야곱은 130년을 살았습니다. 손자까지 합쳐서 70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이룬 사람이죠. 그런데 자신의 나이가 얼마 못 된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평가할 때 나그네 길이라고 말하고,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하죠. 야곱이 자신의 인생을 험악하고 얼마 못된다고 말한 이유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 속에 경험한 것들을 평가한 고백입니다. 결국 내 인생, 내 삶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극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평가하게 되죠.
그런데 본문의 시편 기자는 우리 인생을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버리는 풀 같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춰 우리 인생이 그만큼 짧다는 것을 뜻하는 고백입니다. 천 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춰 보면, 우리의 70, 80년, 앞으로는 100년 인생이겠지만 그마저도 하루같이 짧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인생이 신속히 날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인생 속에서 경험한 것이 너무도 단순하기 때문이죠. 많은 것을 성취하고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단순한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신속히 날아간다고 한 것이죠. 그와 같은 인생의 단순함이 무엇입니까? 10절에서 그렇게 밝혀줍니다.“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하고 말이죠. 야곱이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 말하고 험악한 세월이라고 말하듯이 오늘 시편 기자는 우리 인생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나를 위한 인생만을 살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떠나 내 욕심만을 위해 살면 정말로 인생은 짧디 짧고 그 인생은 들의 풀과 같을 수밖에 없죠. 그리고 그 인생은 5절처럼 ‘홍수처럼’ 쓸어 가게 되고, 7절처럼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게 되고’, 8절처럼 ‘죄악의 들춰내시는 것’ 밖에 안 되죠. 그래서 9절처럼 그 인생이 ‘주님의 분노 중에 지나가고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는 것’ 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똑같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울 수 있는 그런 시간들, 그런 인생들을 건져 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에베보서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하고 말씀하죠. 여기에서 ‘아끼다’는 헬라어 ‘엑사고라조’는 건져올린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세월을 의미있게 건져 올리는 자만 진정으로 세월을 아끼는 자요, 그런 인생으로 100년을 살게 되면 그야말로 천년을 산 것이고, 영원을 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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