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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능히 떡도 주시며(시78:1-39)

by 똑똑이채널 2022.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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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8편은 한 영적 어른이 후손들에게 인생을 왜 소망가운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비유를 통해 교훈하는 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전수해왔습니다. 특별히 출애굽이야기와 다윗이야기를 즐겨 해왔는데,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시고, 광야에서 훈련시키시어 약속의 땅으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소개해왔고, 다윗을 통해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국가로 세우셨는지를 이야기해왔습니다.

 

본문 8절을 보면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지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시인은 그가 이 글을 쓰는 분명한 이유를 밝힙니다. 조상들과 같은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후 시인은 오늘 본문 1-38절 사이에서 중요한 화두를 던집니다. 19절에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한 마디로 ‘광야에 서 식탁을 경험할 수 있는가?’입니다. 광야의 특징은 결핍입니다. 광야라는 단어의 뜻도 ‘텅 빈 넓은 들’입니다. 비어 있고, 생명이 없는 곳이죠. 그런데 그런 광야와 반대되는 식탁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풍성함입니다. 그런 결핍과 불안의 광야 인생 여정에 하나님께서 과연 채워주시는 식탁을 경험하며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을 화두로 던진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완고하며 패역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충성하지 못했습니까? 광야 같은 인생살이 속에서 식탁을 베푸실 이가 하나님이심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광야 같은 인생에서 식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한 외딴 마을에 청교도 목사인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고, 순결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온 늙은 두 자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1871년 한 폭풍이 치던 날 밤, 도망자 행색을 한 프랑스 여인이 찾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이 ‘바베트’라는 이름의 여인이 그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무급 하녀처럼 시골 하녀로 살아가죠. 12년이 지난 어느 날, 청교도 목사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 꾸준히 프랑스 복권을 응모했던 ‘바베트’가 1등 당첨으로 1만 프랑을 타게 됩니다. 그리고 ‘바베트’는 그 기념식을 자신이 준비하겠다고 하죠. 그날부터 최고급 식재료가 집으로 배달되기 시작하고, 목사의 두 딸은 순결과 금욕의 삶이 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드디어 만찬 날이 되어 12명이 초대되어 식사를 하는데, 아무리 좋은 음식이 나와도 단 한사람 외엔 아무도 얼굴에 변화가 없습니다. 젊은 시절 자매 중 언니를 사랑했으나 끝내 떠난 근위대 소속 로렌스 장군만 음식이 나올 때 극찬과 감동을 표현하죠. 그러자, 한 사람 한사람의 얼굴에 미소와 기쁨이 넘쳐나기 시작하고, 최고의 만찬을 접대한 바베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나는 카페 엥글레의 수석 요리사였습니다. 오늘 음식에 내가 가진 1만 프랑을 다 썼지만 나는 가난하지 않습니다자신의 모든 소유를 깨뜨려 식탁을 차린 바베트의 희생을 통해, 목사가 죽은 후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고 싸웠던 사람들은 화해의 음식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치고 서로 용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파리에서 가장 유명했던 ‘카페 엥글레’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그 음식들이 노르웨이 한적한 시골에 등장한 것이죠. 금욕과 소찬으로 우울하던 그 마을에 식탁을 통해 빛이 비추기 시작하죠.

사실, 바베트의 삶은 프랑스 혁명에 동참함으로 남편도 자녀도 다 잃고 도망 나온 광야의 길이였습니다. 또한 훌륭한 목사의 삶을 이어 살아가느라 사랑도 하지 못하고, 나누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고 경건의 모양만 유지한채 살아가는 두 자매의 삶도 광야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인의 희생과 나눔으로 그들의 광야에 식탁, 풍성함과 회복의 빛이 임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바베트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여전히 무급하녀로 말이죠. 겉은 변한 것이 없으나, 다만 그들의 일상이 더 이상, 결핍이 아닌, 나눔과 함께함의 식탁이 그들의 삶에 중심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태백산의 예수원도 마찬가지죠. 강한 추위와 거친 산세로 유명한 곳이 태백산입니다. 그 거친 땅에 하나님의 식탁이 마련돼 있습니다. 예수원이 바로 그곳이죠. 대천덕 신부님의 사모님 되시는 현재인 사모님이「예수원이야기-광야에 마련된 식탁」이라는 책을 펴냈죠. 그 책에서 그녀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33, 이 모든 세월을 기적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광야에 마련해 두신 식탁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약속이 어김없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쓸쓸한 바람과 거친 산세로 유명한 태백의 산골자기, 마치 광야 같던 그 땅에 예수원이 세워지고, 하나님께서는 대천덕 신부님의 기도와 희생으로 태백 땅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운데 따뜻한 식탁, 영성과 노동의 식탁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런 광야의 식탁은 복음서에도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에 걸쳐 광야 같은 사람들의 심령에 따뜻한 식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5병2어를 통해 5000명이 넘는 결핍의 사람들에게 식탁을 베풀어주셨고,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잡이에 나선 제자들 그러나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하신 말씀과 더불어, 그들이 순종할 때 많은 물고기를 잡았죠.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식탁을 준비하셔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죠. 광야와 같은 그들의 결핍의 바다에 주님께서 식탁을 마련하신 것이죠. 그리고 죄책감과 부끄러운 마음으로 인해 광야와 같은 심령으로 살아가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그와 같은 광야의 식탁을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은총,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오늘 본문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향해 광야를 가는 동안 식탁을 베푸셨습니다. 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집과 아집과 완고하고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식탁을 베푸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배반한 제자들에게 찾아가셔서 손수 조반을 만들어 주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을 바라보면서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내양을 먹이라’ ‘식탁을 베풀라’고 명령하셨을까요?

35절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그리고 38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인간의 연약함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며, 조상들의 삶속에서도 고집, 아집, 패역함으로 가득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시편78편을 통해 시인은 그의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죠.

 

[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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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혹은 갈릴리 호숫가의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을 향한 삶의 광야 속에 식탁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긍휼로 품고 계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악함, 아집, 패역함보다 더 크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하나님께서 식탁을 마련하실 것을 기대하는 하루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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