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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시77:1-20)

by 똑똑이채널 2022.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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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편 77편의 표제어는 ‘아삽의 시’ 그리고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돼 있습니다. 역대상 6장에 보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기도록 성전의 예배제도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당시의 뛰어난 음악가 3명을 선정해 성전에서 찬양대를주관토록 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손자인 헤만, 그리고 헤만의 우편에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아삽. 마지막으로 헤만의 좌편에서 직무를 수행한 에단 그를 일컬어 여두둔이라고 부르죠. 후에 헤만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아삽은 많은 시를 짓고 또 선견자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두둔 만이 시에 곡을 붙여 작곡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시56, 57, 58, 59, 69, 75편 표제어에 보면 당시에는 백성들이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민요 같은 곡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는데, 시39, 시62, 시77편은 여두둔이 작곡한 곡에 따라서 부른 노래로 나옵니다. 시편 77편은 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 중에 하나님께 탄식과 하소연으로 부르짖는 것으로 시작해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격려로 끝이 납니다. 시인이 겪는 환난이 개인적인지, 혹은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겪는 것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시편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의 방언으로 구술돼 있다고도 말하죠.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 가운데 쓴 시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이 시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전반부 1-9절은 불안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그리고 후반부 10-20절은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에 대한 감사와 소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2절을 통해 시인은 환난 중에 가장 먼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목소리 높여 소리 내어 기도하고, 손을 들고 기도하고, 밤을 새워 기도하죠.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과 응답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지 않겠다고 결단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슬픔과 절망에 빠져서 있을 때에 하나님을 찾고 또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찾겠다는 시인의 의지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3-7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지난날 자신과 함께 했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더 깊은 불안과 근심 가운데 심령이 상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히 위로를 가져다주는 것인데도, 더욱 불안해합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 조상들을 고통가운데서 구원해내셨는데, 지금은 아무런 반응도 취해 주지 않는 상황이라,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한밤중에 눈도 못 붙이고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이죠.

8-9절은 과거에 형통했을 때와는 너무나 대조가 되는 비참한 상황으로 인해 낙심하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고, 7-9절은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이 이제는 끊기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인지, 그의 노여움이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인지, 의아해하는 상황입니다. 그의 마음에 온갖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몰려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모습이 비단 아삽이나 여두둔만 그렇겠습니까?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고,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기도의 응답이 바로 오지 않고 고통의 현실이 지속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길어질 때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죠. 그만큼 아삽이나 여두둔이나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이 고통은 누구나 겪을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그 터널을 어떻게 극복하게 됩니까?

10-11절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의심으로 가득했던 시인은 즉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능력의 오른손으로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며 기억하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그야말로 전반부에서 탄식하며 괴로워하던 시인이 이제는 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기로 결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어찌 자기 의지와 결단으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지난 날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면 가능한 법이죠.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주님을 배신하고 도망쳐버렸지만, 그런 그를 내팽개치지 않고, 주님께서 찾아와 당신이 찔린 창자국과 옆구리에 손을 만져보라 하면서, 너는 나를 배신했을지라도 나는 너를 여전히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격려해주셨을 때, 그가 남은 인생을 주님께 내어드릴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 13-15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의 위대하신 능력을 보이시며, 당신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들을 애굽에서 어떻게 능력의 팔로 구원해 내셨는지, 그만큼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16-20절은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홍해를 가르셨다는 것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온 모세가 홍해 앞에서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자기 한계를 절감하고 있을 때, 그를 향해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향하게 했죠. 그때 물이 좌우의 벽을 만들어 갈라졌고, 표면만 그런 게 아니라 그 깊은 곳까지 진동하며 물이 완전히 마른 땅처럼 갈라졌죠. 바로 그곳에서 애굽 군대는 진멸당했죠. 그래서 19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은 거룩하고 선하시지만, 그 일을 행해 나가시는 과정들은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께서 행해나가시는 과정을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묵묵히 순종해야 하죠. 왜냐하면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늘 선하신 길을 열어나가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오늘 아삽의 시, 곧 여두둔이 작곡하여 노래를 부른 이 시편은 전반부에서 절망과 두려움의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심지어 하나님을 의심하는 모습까지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위대하신 일들을 회상하고는, 그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 속에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없어 근심에 사로잡힌 한나가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며 마음 속에 평안을 얻은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사무엘상 1장 17-18절에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한나가 기도하여 구한 것이 허락되었다는 엘리의 말을 듣고는 그의 얼굴에 다시는 근심의 빛이 없었다고 하죠.

 

[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www.aladin.co.kr

그처럼 본문의 시인인 아삽도, 작곡가 여두둔도, 또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그동안 하나님 앞에 가졌던 모든 질문과 의아함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면 곧장 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면, 우리가 직면한 상황속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고, 새로운 은총의 길을 열어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난 날 속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봐도 충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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