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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하나님이여 원통함을 푸시고(시74:1-23)

by 똑똑이채널 2022.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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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보루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떠한 적의 침입이 있을지라도 결코 쉽게 무너지는 않는 난공불락의 방어요새나 방어 구조물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어떠한 적의 공격과 침범이 있어도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최후의 보루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생활의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실 때 홍해를 가르며 기적을 행하셨던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 마다 먹을 음식을 공급해 주셨던 분이 하나님이 아니셨습니까? 이스라엘보다 큰 거인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하며 가나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던 것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한 이스라엘은 결코 무너질 수 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표시였고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는 한 이스라엘은 결코 무너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이스라엘에게는 결코 허물어질 수 없는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토록 신뢰했던 예루살렘 성전과 도시 전체는 허무하게 허물이지고 말았습니다.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도끼를 휘두르며 성전을 훼손하고 있는 악한 군대의 소행은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죠. 그렇게 해서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 도시가 무너진 거십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원전 586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침략을 당해 성전과 예루살렘 도시가 짓밟힐 그 때에 시인은 처참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아니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고난이자 탄식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분명하고, 그 분이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이 당하는 이 처참한 현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아삽은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과 동시대 인물로서 다윗이 조직한 찬양대 곧 성가대의 리더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방 세력들에게 당하는 자국민들을 향해 3b-7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너무도 분명한데 그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와 생생한 역사의 증거가 우리 삶에 있는 것이 너무도 확실합니다. 지금 나에게 펼쳐지고 있는 일들이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면 우리는 오늘 시인처럼 ‘하나님이 나를 치시는 구나, 하나님이 내게 진노하시는 구나' 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어찌하여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습니까?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진노하시는가보다' 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재앙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죠.

 

본문 9절입니다.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정말 괴로운 것은 괴로움의 끝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끝을 알면 소망을 가지련만 이 고난과 역경의 끝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역경보다도 더 큰 절망을 가져다주죠.

이러한 끝을 알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시련과 절망 속에서 시인은 12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하고 말이죠. 과거에 이스라엘 가운데 역사하셨던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하나님에서, 절망과 나락가운데 빠진 미천하고 연약한 한 존재, 바로 시인 자신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다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

옛적부턴 알아오던 그 하나님을 시인은 재앙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가 절망의 나락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내 실존에 다가와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절망의 끝에서 선조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절망의 깊은 나락에서 만나는 나의 하나님, 나의 왕으로 말미암아 내 자신은 다시한번 소생케 됩니다.

 

이제 시인은 자신의 하나님께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하심에 의지하여 간구의 기도를 드립니다. 본문 16-18절 그리고 20-21절 말씀입니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그 언약을 눈여겨보소서 무릇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나이다 학대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1907년 북한 땅 평양에 대부흥이 불길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북한 땅에 공산주의 압제와 탄압이 이어질 있을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피를 말리는 고문의 탄압 속에서 등뼈가 붙어버리고 도저히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몰골로 살고 있는 오늘날의 북한 크리스천들 마음이 어쩌면본문의 시인, 곧 아삽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현실의 상황을 기억하여 주시고, 주의 신실하신 주의 백성을 향한 언약을 기억해달라고 탄원합니다.

 

 

[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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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본문 22-23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라면서 질문을 제기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추악한 일을 당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묻고 계십니까?

그 처참한 현장에서 시편 74편의 시인처럼 ‘나의 하나님’으로 다가 오시는 주님께 우리 모두 이렇게 기도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주님, 지금은 내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가 되었으나 주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사 언젠가 주의 이름을 가슴깊이 찬송하게 하소서. 주여 포악이 가득한 이곳, 어둠이 가득하고 파괴와 살인이 가득한 이 땅에서 주의 구원과 영광을 보게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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