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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편은 작가 미상의 시입니다. 누가 어떤 상황 속에서 시를 썼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전체 내용의 흐름으로 볼 때 이 시를 쓴 시인은 노후에 들어서 이 시를 쓴 게 아니겠나, 하고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18절에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하는 고백이 그렇습니다. 그만큼 시인은 일생토록 자신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해서 확신에 찬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기 삶 속에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에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감격에 찬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와는 달리, 체험이 없는 신앙은 뜨뜻미지근할 수밖에 없죠. 한때는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살다보면서 점점 메말라가고 무뎌지는 부부의 모습처럼 말이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확인할 때 부부의 관계가 아름답게 유지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그 사랑을 경험하고 체험할 때 더욱더 깊고 건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의 시인은 1, 3, 4, 7절에서 ‘주께로 피하겠다’는 고백을 반복합니다. 1절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3절에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4절에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그리고 7절에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그것은 환난과 곤경의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 상황을 꿰뚫고 나갈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 때만이 아니라 전 인생이 그렇죠.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현재까지, 끊임없는 환난과 고난으로 인해 갈등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죠. 그러나 그때마다 ‘항상 피할 바위가 되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3절도 마찬가지죠.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은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환난과 곤경의 상황에 직면할 때, ‘주님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요, 반석이요, 요새’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주님이 나의 숨을 바위, 반석, 요새이심을 느낍니까? 혹시 매일 그런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그래야 되지만 우리들은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느낄 때가 있습니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그래서 이제는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고백할 때, 주님이 나의 반석이심을 고백하게 되죠.
시인은 계속해서 자기 믿음의 출처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5-6절에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오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인은 어릴 때가 아니라, 아예 모태에서부터 주님을 의지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태에서 어떻게 주님을 의지했다는 말입니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가 주님을 어떻게 알고 의지했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자신은 모태신앙이라고 말이죠. 이 말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믿었다는 뜻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의 의지로 믿었다기보다는 부모님의 신앙 때문에 믿게 된 것이죠. 부모님의 신앙에 영향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태신앙하면 마치 자기 자신이 그 신앙의 출발점인양 자랑하기도 하죠. 엄밀하게 말하면 모태신앙이란 말보다는 모태출석이 정확하겠죠.
6절을 다시 보면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지금 시인은 자신이 주님을 택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셨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의 의미는 시인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먼저 알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 먼저 하나님께서 시인을 알고 그 안에 믿음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죠. 모태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육신의 부모님이나 제대로 알기나 할 수 있습니까? 모태에 있는 핏덩이 존재가 알 수 있는 게 무엇이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믿었다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에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이죠.
그러므로 시인이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붙잡아 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의 고백처럼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하면서, 늙어 스스로 자기를 지킬 힘이 없을 때에도,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간구하며 나아가는 모습이죠.
그것은 사도 바울만 해도 그렇죠. 바울이 그토록 위대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신약성경의 3분의 2를 집필할 정도로, 대단한 역사를 펼쳤고, 마지막 디모데후서를 쓰면서, 로마의 지하 메마틴 감옥에 갇혀 이제 곧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모든 믿음과 용기의 근거가 바울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라, 주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점 말입니다. 주님의 핍박자요,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는데 앞잡이 역할을 했던 사울이 그토록 주님을 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고 없이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었죠. 다른 체포조원들도 다 있었지만, 유독 자신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으로 다가오신 그 사랑 앞에 그가 거꾸러졌고, 그가 변화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모든 기질과 지식과 삶의 내용들을 주님께 헌신하며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도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 뿐이라고 고백했죠.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바울은 그만큼 자기 믿음이나 자기 능력 때문에 그런 일을 행했다고 자랑치 않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그런 믿음과 용기가 생겼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본문 9절을 다시 보면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고백하죠. 사람들은 효용가치가 있을 때는 그 사람을 이용하지만 그 사람이 늙으면 더 이상 그를 이용하지 않고 떠나려고 하죠. 본문의 시인도 그런 인간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도 자신이 늙어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되면 버리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모습이죠. 그런데 이런 염려 걱정이 우리 마음속에도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나님께서 나를 더 이상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고 말이죠. 그러나 그것 또한 인간적인 관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시시각각으로 변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허물과 실수를 할지라도 해바라기처럼 당신을 향한 얼굴을 바라보며 늙어 죽을때까지, 내 힘이 다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미우나 고우나, 잘났으나 못났으나,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저버리지 않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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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게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도, 본문 14절의 고백처럼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라”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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