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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시69:1-36)

by 똑똑이채널 2022.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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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을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다양한 마음의 고백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제 살펴봤던 시편 68편에서,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에 대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죠. 그런데 바로 그 다음 편에 나오는 오늘 읽은 시편 69편은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는 시인의 마음을 접하게 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장의 내용 사이에 서로 상반되는 시인의 고백과 마음을 대하면서, 인간의 삶은 기쁨의 감격을 경험하다가도 어느 순간 슬픔의 절망 가운데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 모습이 당연한 일인 텐데, 내 삶에는 그런 슬픔과 환난보다는 기쁨의 감격만 넘쳐났으면 하는 욕심이 들어 있음을 스스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이 마음이 비단 저의 마음뿐이겠습니까? 사실 우리 주님께서도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와 기쁨의 관을 쓰시기 전,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처참하게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런 주님이심을 잘 알면서도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이 찾아올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하나님께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하죠.

 

오늘 본문의 표제가 ‘다윗의 시’로 나와 있지 않습니까? 혹자는 이 시가 예레미야가 썼을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표현 가운데 많이 등장하는 내용 때문일 것입니다. 2절에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10절에 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11절에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14절에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20절에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하는 말씀의 내용들 때문입니다.

왜 그런 표현들 때문에 예레미야가 이 시를 썼을 것으로 추정을 하는 걸까요?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멸망할 것을 하나님의 시선 속에서 내다본 선지자였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도 예레미야의 입술을 사용해서 타락한 백성들,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죠. 바꿔 말해 그만큼 하나님 앞에 다시금 돌아서길 원했던 예레미야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외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자, 예리미야 선지자가 어떻게 말합니까? 너희는 애굽과 손을 잡지 말고, 차라리 바벨론과 손을 잡으라고 말하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라고 외쳤죠. 그런데 그때 거짓 선지자들이 예레미야의 뺨을 치고, 예레미야를 깊은 수렁에 빠드려버리고, 그를 굶주리게 해 버리죠. 그러면서 정말로 바벨론이 쳐들어오는지, 그 바벨론이 우리나라를 무너뜨리는지, 지켜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과 손을 잡으면 그 어떤 바벨론 세력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데, 왜 너는 매국노처럼 바벨론과 손을 잡으라고 하는지, 계속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해 어용선지자들, 정치권력과 손을 잡고 살았던 거짓 선지자들이 그렇게 예레미야를 비방하고 짓눌렀던 것이죠.

바로 이런 내용 때문에 시편 69편의 시는 예레미야가 쓰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상황은 비단 예레미야만 겪은 게 아니라, 그 옛날 미가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남왕국 유다의 왕 여호사밧과 손을 잡고 이방 세력을 물리치고자 할 때, 그때 다른 선지자들은 다 아합의 지원을 받고 있던 어용선지자들 곧 거짓 선지자들이었죠. 그런데 미가야 선지자만큼은 진실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지자였죠. 그런데 그 미가야 선지자는 길한 예언은 하지 않고 흉한 예언만 하는 선지자로 이름이 나 있었죠. 왜 그렇게 흉한 예언만 하는 이로 알려졌을까요? 아합 왕의 시대가 다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에, 어찌 길한 예언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선지자들은 다 연합군을 꾸려 전투에 나가면 다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는데, 마지막 미가야 선지자를 부르자고 여호사밧 왕이 부추겼죠. 그때 아합 왕이 마지못해 미가야 선지자를 부르는데, 그때 미가야는 당신들이 연합군을 이끌고 나가면 이스라엘 군대는 목자 없는 양 같이 다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는 흉한 예언을 하죠. 그때 어용 선지자의 하나인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빰을 치면서 모욕을 줬죠. 그리고 아합 왕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둬버리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도록 하죠.

그만큼 예레미야나 미가야 선지자 모두 하나님의 긍휼어린 마음을 전하다가 그렇게 고통에 처한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웅덩이나 감옥에 처하고, 또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는 모습이 어디 예레미야나 미가야 선지자뿐이겠습니까? 다윗도 실은 다르지 않았죠. 이유 없이 사울 왕의 칼날에 쫓겨 다녔고 수많은 비방과 모욕을 들었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어야 했던 다윗이죠.

 

그래서 오늘 읽은 시편을 다윗만이 아니라, 이 땅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곧 하나님의 긍휼어린 마음을 지닌 자의 모습으로서, 남들에게 해로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이들 역시 똑같은 이 시편의 주인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그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어찌됐든 지금 1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지금 그의 영혼에까지 물들이 흘러들어왔기에 하나님께서 꼭 구해 주셔야 한다고 간절히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시인은 그의 상황이 얼마나 답답하고 어려운지, 지금 자신이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고 고백합니다. 마침내 큰물이 넘쳐버리는 것 같은 암담하고 고통스러운 상태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하죠.

최근에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습니까? 가뭄에 비는 단비라 참 좋지만, 그 단비가 순식간에 시뻘건 흙탕물로 변해 범람하는 강물로 불어나면 사람들은 두렵게 되죠. 2004년의 인도네시아와 2011년 일본에서 발생한 쓰나미가 육지를 덮칠 때의 모습도 그랬죠. 마치 먹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맹수처럼 무섭게 건물과 사람을 삼기는 물의 위력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그런 모습처럼 시인의 인생 속에 그런 강물의 위협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영혼에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고 말이죠.

하지만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는 시인은 그 상황 가운데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먼저는 5절에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하면서 자기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는 13절에서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그리고 더 나아가 14절에서는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하고 간구하죠. 한 마디로 ‘주님 살려 주세요. 주님 도와주세요. 제발 나를 수렁에서 건져주시고 빠지지 말게 해 주세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과 저 무서운 깊은 물에서 살려주세요’하는 간구의 목소리입니다.

 

이런 시인의 모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렸던 우리 예수님의 기도와 흡사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대 땀이 핏방울과 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죠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22:44)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 나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은 따르려 하면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것은 부담스러워 합니다. 편안하게, 그리고 적당히 내 입맛에 맞는 신앙생활은 원하면서도, 힘쓰고 애써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선 주저할 때가 많다는 것이죠. 아무쪼록 저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동안에 주변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비방하며,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핀잔을 한다 해도, 그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더욱더 집중하며 간절히 매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공의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 자신을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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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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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의 인생 가운데 정말 곤고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될 때 우리는 더욱 주님께만 집중하며 나가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기 전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기도의 본을 따라, 이제 내가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친히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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