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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68편은 다윗이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찬양시입니다. 그러면서 찬양, 감사, 역사의 회고, 구원의 호소, 저주, 기도 등 시편에 기록된 모든 종류의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시의 중심을 잡기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의지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고, 그들을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는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자신을 알리시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죠.
5-6절의 표현을 보면,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이 표현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거룩한 처소에 계신 분’으로 그려주고 있고,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재판장’ 그리고 ‘고독한 자들을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을 형통하게 이끄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죠. 하나님은 하늘의 성소에 계신 분이시죠.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초월자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고백하죠. 그 고백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초월적인 면과 함께 우리 삶에 깊이 개입하시는 면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모든 것들을 감찰하시지만, 동시에 이 땅에 있는 연약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친히 돌보시는 분으로 말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으로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었죠. 혈연적인 유대가 강한 가부장 중심의 유대사회에서 가장인 아버지나 남편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기본적인 보호막도, 경제적 공급원도, 모두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이죠. 또한 6절에 나오는 ‘고독한 자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에 놓인 자들을 말하고, ‘갇힌 자들’은 자유가 제한당한 상황에서 고역과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말하죠. 그런 뜻에서 볼 때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고아, 과부, 고독한 자, 갇힌 자는 모두 세상적으로 연약하고 소외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재판장, 그리고 후원자가 되어 주신다고 증거하고 있죠.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들을 돌보신다는 말씀은 이미 모세오경을 통해 친히 밝히신 바가 있습니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22:22-23),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10:18)
그만큼 본문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인자하심, 고아와 고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모세오경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연관이 돼 있는 것이죠.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속박을 당하고, 또 고아와 같이 이방 땅에 객으로 산 그 선조들의 삶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펴주셨고, 그들을 자유민이 되어 살도록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도록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다윗이 그 사실을 환히 알고 있었고, 자기 자신 또한 배다른 7명의 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외로운 목동으로 살고 있었는데, 그런 자기 자신을 돌보시고 친히 품어주셔서, 왕으로 삼아주셨으니, 어찌 그 하나님을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아버지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사역을 그렇게 표현하신 바가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원사역을 펼치신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 먼 자를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모세오경을 통해 그리고 다윗의 삶을 통해 고백하는 그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는 예수님의 공생애 목적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을 소유하도록 해 주시고, 마귀와 사탄의 영적인 사슬에 매여 있는 자들에게 자유함을 주시고, 영적으로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그리고 삶 속에 억압받고 있는 외적인 상황속에서도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그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복음의 참된 정신을 오늘날의 교회가 진정으로 품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죠. 예전에는 민족 독립운동, 물산장려운동, 애국계몽운동을 하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나라를 주도해 나갔고, 그 때문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죠.
하지만 지금은 역설적인 상황을 맞이하고 있고, 오히려 세상의 조롱을 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펼쳐 보여주셨던 그 가치를 구현하기보다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 많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구현하셨던 십자가의 삶을 세상 속에 펼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함께 하고, 영적인 자유함을 주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해 주고,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는 교회여야 하는데, 그 길 보다는 높고 많고 큰 자들과 함께 하는 교회의 모습 때문이죠.
그 중에 가장 큰 실수와 잘못이 있다면, 교회가 세상의 정치꾼들과 손을 잡고 세상을 주도하려는 모습이 가장 크지 않나 싶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옥성득 교수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그 책에서도, 왜 1930-60년대까지 한국교회다움의 모습이 없었는가? 그 이유를 연세대 총장인 백낙준 씨가 이승만 정권에 부역해 버렸기 때문에 그렇고, 그 뒤에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당시 민족교회론을 들고 나온 민경배 교수 역시 박정희 정권에 힘을 보태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지만 너무 세속적인 부분에 물들고 함께 손을 잡고 가게 되면 교회다움은 자연스레 상실하기 마련이죠. 교회가 세상의 것을 너무 많이 가지게 되면, 비록 세상적인 힘은 지닐 수 있을지라도, 세상을 선도할만한 영적인 힘은 상실하게 되죠. 교회가 강함과 성공, 능력과 누림에 마음을 빼앗겨 참된 겸손과 섬김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영적인 것으로 교묘하게 위장된 자기 욕망을 추구하면, 교회의 신뢰는 급격하게 떨어지는 게 역사적인 과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의 관심은 어디에 둬야 할지 명확해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관심, 우리의 눈길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지, 하나님께서 어디에 눈길을 두고 계시는지 헤아리는 데 있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역을 펼치셨는지, 어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공생애 삶을 사셨는지,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런 인생이 짧고 굵다 할지라도, 그런 인생만이 영원 속에서 건 져올리는 인생, 그런 그의 시간은 낮은 12시간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눈길에 크고 화려한 것보다 작고 연약한 자들에게 마음과 눈길이 머물 수 있도록, 그런 자들을 더 품고 세울 수 있도록,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그런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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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세상의 크고 화려한 것만 바라는 모습처럼 달려온 교회요,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 앞에 외면받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걸 위해 걸어가던 길에서 멈춰서서 주님의 눈,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내 곁에 두신 이웃들을 발견하게 하시고, 내 작은 사랑과 손길을 내밀며 살게 하시옵소서. 그런 저희들의 사랑과 발걸음들이 모여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밑거름이 되게 하시고, 그런 인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인생의 씨앗이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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