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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직구’라는 말이 요즘 유행어입니다. 야구에서 돌처럼 강한 직구를 날릴 때 칭하는 말인데,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거침없이 바로 이야기하는 걸 빗댄 말입니다. 시편 73편은 마치 그렇게 돌직구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돌직구이겠습니까? 악인의 형통함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돌직구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인도 저렇게 잘 살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살려고 벌버둥치는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하고 돌직구를 날리는 모습이죠. 그만큼 시인은 그럴듯해 보이는 믿음으로 현실을 포장하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보이는 모습 그대로 세상을 직격탄을 날리는 모습이죠.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시인의 현실과 다르지 않음을 사회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악인들이 득세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던지는 돌직구는 묵직합니다.
오늘부터 시편 제 3권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처음 시편을 살펴 볼 때 시편은 모세오경처럼 5권으로 분류한다고 했습니다. 제1권은 1-41편까지, 제2권은 시편 42-72편까지,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하는 73-89편까지가 제 3권에 해당됩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시편 73편의 표제는 ‘아삽의 시’로 돼 있습니다. 아삽이 누구입니까? 역대상 6장 39절을 보면 아삽은 ‘베레갸의 아들’이고, 역대상 15장 17절을 보면 아삽은 헤만과 여두운과 함께 다윗이 조직힌 찬양대 곧 성가대 대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하 29장 30절에서는 아삽을 선견자로 칭하고 있고, 느헤미야 12장 46절을 보면 아삽은 다윗과 동시대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삽은 그만큼 성전의 찬양대 리더자였고, 찬양만 담당했던 게 아니라 선견자로서 시대와 상황을 말씀과 기도로 꿰뚫어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취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까닭에 의롭고 선한 길을 좇던 아삽으로서, 이 세상의 불의한 자들, 악한 자들이 취하는 모습 앞에 돌직구를 날렸던 것이죠. 아삽의 인생 걸음도, 그런 악한 자들로 인해 미끄러질 수 있죠. 더욱이 인생길에서 만난 악한 자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신앙양심과 지향점들이 크게 흔들릴 수 있죠. 그로 인해 질투가 생기죠. 그래서 이 세상 속에서 오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이 천벌을 받으리라 믿었는데 웬걸, 그런 자들이 오히려 더 형통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뭘 먹고 다니는지 몸에는 윤기는 철철 넘쳐흐르죠. 사람이라면 으레껏 당하게 되는 고난도, 재앙도 그런 악한 자들에게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돈은 얼마나 잘 벌고 또 얼마나 잘 쓰는지, 피둥피둥 살찐 모습만 하고 다니죠.
주일날 오후에 예술 쪽에서 일하는 어떤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분이 홍익대 미술학과 학생들과 그들을 지도하는 교수의 의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미대와 같은 예술대학에 들어가려면 실기시험을 보게 되는데, 그 실기시험을 준비하는 학원에서 한 번씩 교수들을 초청해서 체크해주고 평가받는 시간들을 마련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 교수들의 평가를 받기 위해 학생 개개인으로부터 걷는 돈이 장난이 아니고, 그 한 번의 평가로 인해 천만원이 넘는 돈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죠. 문제는 그렇게 쉽게 번 돈을 결코 귀하게 또는 필요한 대로, 물 흐르듯 연약한 곳으로 흘러보내기는커녕 유흥비로 흥청망청 써 버린다는 것이죠. 물론 최근에 홍익대 총장에 부임한 분이 그런 교수사회의 패악들을 바로 잡고자, 대입시험에 실기시험을 빼 버리고 평소 그린 작품들을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제출하도록 바꿔나가고 있다고 하죠. 어디 홍익대만 예전에 그랬겠습니까? 다른 대학들도 교수들이 학생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구조가 참 많았죠. 그래도 학생들은, 특별히 예술 계통에 있는 학생들은 그에 대해 항의하지도 못하고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죠.
어찌 보면 그것이 한 단면인 것 같지만, 우리사회의 전체적인 부정직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회의 모습이 지금 이 사회에만 가득 찼던 게 아니라, 그 옛날 다윗이 왕으로 있던 시대, 그와 함께 찬양대의 리더로 활동했던 아삽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아삽이 찬양대의 리더자, 곧 예술 계통의 지휘자요 감독자 역할을 했기에 그 속에서 일어나는 악한 자들의 모습을 얼마나 봤겠으며, 그로 인해 돌직구는 또 얼마나 날렸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돌직구를 날려도 과연 하나님께서 알 수 있겠냐고, 신세 한탄 하듯이 외치는 고백이 있습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
아삽에게 회의가 몰려 온 상황이죠.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세상의 구조와 악한 자들의 형통을 알기나 하시는 것인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없이 산다 한들 그것이 유익이 되겠냐고, 한탄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절)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괴로움에 치우쳐 이렇게 고백하죠.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14절)하고 말이죠. 문제는 자기 자신은 그렇게 재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데, 악한 자들은 항상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가 살아가는 세상이 피곤치 않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피곤함과 번민 속에서 그가 하나님의 성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아삽은 그 집에서 마음 속의 회의감, 패배감, 한탄, 괴로움 등을 드러내게 되죠.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6-17절)
과연 시인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무엇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까? 자기 괴로움, 자기 번민, 자기 한탄과 고통 속에서 성소, 곧 하나님의 성소를 찾아들어갔는데, 그때 그가 깨달은 게 무엇입니까? 가장 단단한 곳에 서 있는 줄로 알고 있었던 악한 자들이야말로 가장 미끄러운 곳에 서 있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장춘몽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악인들이 누리는 안정과 번영은 한순간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20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표준새번역성경의 말씀입니다.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아삽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웠습니다. 세상에서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무지와 자기 자신의 무지가 다를 바 없다는 걸 말입니다. 세상의 악한 자를 볼 줄 아는 자신인데도 실은 하나님의 지혜를 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시인이 복으로 삼은 게 무엇이었습니까? 악한 자들의 파멸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이 진정한 복으로 삼은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었습니다. 그것을 28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죠.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아삽은 악인들을 파멸만을 바란 채 하나님의 섭리를 운운하던 자였는데,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기 자신이 그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세상의 악을 보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그들을 모두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지 못한 것 자체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악한 자들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자기 자신의 마음도 속물근성에 지나지 않음을 철저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만큼 아삽은 저들만 하나님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자신 역시도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음을, 저들만 짐승 같은 자들인줄 알았는데 자기 자신도 우매 무지한 짐승과 같기는 마찬가지였음을 깨우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25절을 통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하며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세를 취하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세상의 악한 자들의 형통과 잘됨을 부러워하거나 혹은 그들이 다 패망하기를 바라는 것보다 그들 모두를 진실로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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