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예화) 앞으로 카타르 월드컵 축구가 한창 달아오르겠죠.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에게 요구한 게 있지 않았습니까? ‘멀티플레이어’ 선수였죠.
어느 정해진 한 자리만을 고수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여러 자리를 두루두루 감당하는 선수를 일컫는 말이죠.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고 맨 전방에 있기도 하고 맨 후방에서 상대팀 공격을 방어하기도 하는 선수 말이죠.
그런데 그런 모습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화나 연극 분야에서도 주연과 조연의 경계가 이제는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죠.
옛날에는 주연이면 주연, 조연이면 조연, 엑스트라면 엑스트라, 그렇게 뚜렷하게 구분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죠.
작품의 성패가 주연 못지 않게 조연에게서 판가름 나는 경향도 많습니다.
유명 배우가 때때로 ‘까메오’로 출연하기도 하고, 조연으로 나온 배우가 주연 못지않은 관록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죠.
(깨달음)그런데 그런 멀티플레이어 선수는 하나님나라의 구원 역사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주연 못지 않게 훌륭한 조연이 필요한 곳이 하나님 나라죠.
우리가 아는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 직전까지 이끌었던 인물이죠.
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율법서와 성막설계도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런 모세가 그렇게 위대한 지도자로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그를 돕는 조력자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 광야로 행진하는 초기에 기억될만한 인물, 그때부터 모세를 도왔던 인물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론이고 다른 하나는 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행진을 시작하자마자 그들의 후미를 공격해 약탈한 족속이 있었는데 아말렉 족속(신25:18)이었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전투 경험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서 그 아말렉 족속과 싸우도록 하셨죠.
그때 모세가 산 꼭대기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데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도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패했죠.
그러자 아론과 홀이 모세의 손을 바쳐주면서 그 손이 내려오지 돌로 바쳐줬죠.
그러자 하루 종일 이스라엘 족속이 아말렉 족속을 상대로 승리하는 은총을 덧입게 되었죠.
그만큼 그 전쟁의 승리는 모세에게 달려 있었던 게 아니라 아론과 홀에게도 공적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모세가 그 후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과 율법사용설명서와 성막설계도를 받을 때 어떻게 합니까?
아론과 훌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탁하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아론과 훌에게 상의하라고 당부하죠(출24:14).
그때부터 모세는 아론과 훌에게 공식적인 2인자 역할을 맡긴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게 있습니다.
그 2인자 격인 아론과 훌이 어떻게 했냐는 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지 40일이 될 즈음 이스라엘 백성은 눈에 보이는 황금송아지를 신으로 만들어냈죠.
바로 그 일의 주동자가 아론이었다는 점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왜 그런 일을 했냐고 물었을 때 백성들이 원하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대답했죠.
그러나 그것은 2인자 역할에서 1인자가 되고자 한 자기 욕망의 강화 차원에서 한 일이기도 했죠.
하지만 훌은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는 산에 올라갈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론과 훌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훌은 그 어떤 주도권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기까지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기다렸을 뿐입니다.
훌은 아론과 같은 2인자였짐나 그만큼 자기 이름값을 떨치지 않고 묵묵히 순종했던 일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훌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의 손자 브살렐을 통해 성막을 짓는 영광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적용)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도 혼자 주역이 될 수 있는 일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주변의 제자들이 협력했고,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때도 수많은 동역자가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의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는 여러 동역자들의 헌신과 협력이 있어야만 든든하게 세워질 수 있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은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나라의 멀티플레이어로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직분을 성실하게 감당하면서도 내 이름값을 드러내지 않고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나보다 뒤늦게 나온 분이 더욱 앞장서서 충성할 때 기꺼이 그분을 격려해주고 협력해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멀티플레이어, 그렇게 자기 이름은 지우고 말없이 충성하는 일꾼을 귀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은 일찍 죽은 아버지 요셉을 대신에 네 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을 돌보고자 목수로 사셨죠.
그것이 30살 전까지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자 30살 때에 가정을 떠나 제자들을 찾아 떠났죠.
그때 맨 먼저 하신 일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많은 인간처럼 낮아지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함이었죠.
그런데 그당시 세례 요한은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산 인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한 스승이었죠.
당시에 죄인 취급받던 세리들과 군인들과 많은 군중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자 나온 이유도 그것이었죠.
그렇게 자신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고자 하는 군중들을 향해 세례 요한이 뭐라고 외쳤습니까?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길을 닦는 자요,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 분은 불과 성령을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했죠.
더욱이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묶고 푸는 것조차 감당칠 못할 자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두고 한 말이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었죠.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3:17)
그때 비로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임을 알아봤죠.
그래서 다음날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하고 선포했죠.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전까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도 세례 요한을 스승으로 따르고 있었는데, 자기들의 스승이 그렇게 선포하자 그 즉시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님께 따라붙었죠.
그때 세례 요한이 자신을 떠나가는 안드레와 요한을 붙잡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죠.
자신은 예수님의 길을 닦는 자일 뿐이요, 자기들의 제자가 참된 구원자를 따른다고 하니 더 격려했겠죠.
그것이 주님의 길을 닦는 자의 겸손함이요, 안드레와 요한도 그 모습을 본받길 원했던 것이겠죠.
그때 예수님을 따라나선 안드레와 요한은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선포하면서 수많은 병자를 고친 걸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생각한 안드레는 자기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갔죠.
“형, 나와 요한이 메시아를 만났어요. 그 분은 정말 구원자예요. 한 번 같이 가보시게요.”
그래서 안드레게 자기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는데, 그때 베드로를 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요1:42)
‘시몬’이란 귀가 얇아 쉽게 흔들리는 사람인데, 앞으로는 반석과 같은 믿음의 뿌리를 내리라는 뜻으로 베드로로 부른 것이었죠.
그렇다면 그때부터 안드레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따라나서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 형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벗어나 스불론과 납달리로 가신다는 말씀 앞에 실망해버렸죠.
예수님께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으로 가신 것은 구약의 이사야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인데, 그들은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실망감을 느낀 안드레와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는 다시금 갈릴리 고기잡이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의 소임을 다한 뒤에 다시금 갈릴리로 돌아오셨죠.
그러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하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갈릴리 지역의 수많은 병자와 연약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안드레와 그 형제 베드로,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을 따라나설 기미조차 없었죠.
그때까지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지 못했던지, 아니면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꺼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도 아니라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따르기보다 고기를 잡으면서 돈벌이나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죠.
바로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고기잡이 현장에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많은 무리에게 천국복음을 선포하신 이후에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찾아가 말씀하셨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보라”하고 말이죠.
그러자 베드로는 “제가 밤새껏 그물을 던져봤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주님 말씀에 의지해 던져보겠습니다.”(눅5:5) 했죠.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되었고 배 두척에 고기를 실었죠.
그리고서는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하고 말했습니다.
그 의미가 뭐라고 했습니까?
“제 연약함을 아시고 제 이름도 베드로로 불러주셨는데, 제가 주님을 믿지 못해 이렇게 고기잡이나 하고 있는데, 어떻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하는 뜻이었죠.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를 내치지 않고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를 향해 말씀하셨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마4:19)
그리고 좀 더 가셔서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까지 따르도록 불러주셨죠.
(전개)오늘 본문은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입니다.
물론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12제자를 불러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교회를 이끌 주역으로 세우셨죠.
그런데 12제자 중에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더 가까이 끼고 둔 제자들이 있었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그들인데, 그 중에 베드로는 수제자처럼 가장 아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가장 신임한 제자는 누구였을까요? 가롯 유다였죠.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살림살이를 책임질 자로 가롯 유다를 세워주셨기 때문이죠.
그만큼 예수님은 가롯 유다를 신뢰하신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총무나 재무를 맡길 때 가장 신임하는 사람을 회사나 공동체의 책임자로 맡기는 것과 같죠.
어쩌면 그것 때문에 가롯 유다가 탈선한 나머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을 재정책임자로 정해서 잘 해결하도록 맡겨주셨다면 다른 세 명의 제자들보다 더 특별하게 대우해주셔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죠.
하지만 세족식을 하고 성만찬을 할 때도, 십자가에 죽기 전날에도,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따로 챙기셨죠.
가롯 유다는 그런 스스로의 배신감 때문에라도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팔아넘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 형제 안드레’입니다.
안드레가 누굽니까?
안드레는 요한과 함께 세례 요한을 스승으로 따라나섰다가 예수님께서 맨 먼저 따라붙은 인물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아끼고 수세자로 여긴 베드로를 맨 먼저 예수님께 데려간 일꾼(요1:42)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벳새다 벌판에 남자 장정만 오천명, 여자와 아이들까지 1만 5천이 넘는 대군중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였죠.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먹을 게 없냐고 물을 때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토막을 갖고 있던 소년을 데려온 이가 안드레였죠(요6:8).
그때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후에 그걸 나눠서 먹게 해 주셨고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해 주셨죠.
바로 그 산파역할을 감당한 일꾼이 안드레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드레가 더욱 중요한 일을 한 게 있습니다.
명절에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 몇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이 바로 안드레(요12:22)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고 수난의 길을 걷기 직전에 예수님을 찾은 이방인들이었죠.
그들은 주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참된 구원자이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지 밀리건이란 성서학자는 안드레를 가리켜 최초의 국내외 선교사였다고 칭송합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와 벳새다 벌판의 그 소년을 주님께 인도한 최초의 국내선교사요 이방인들을 주님께 인도한 최초의 국외선교사였다고 말이죠.
그 얼마나 귀한 사역자였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보다 안드레를 1인자로 세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맨 먼저 따른 것만 봐도, 그가 행한 많은 업적을 바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안드레는, 아론과 달리 행한 훌처럼 또 가롯 유다와 다른 모습을 보였듯이, 결코 자기 명예를 탐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부분을 먼저 알아차리고 흡족하게 해 드린 일꾼이었습니다.
그것이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와는 다른 안드레의 진면목입니다.
그만큼 안드레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살았고, 무슨 일이든 다 감당한 멀티플레이어였습니다.
(주문)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저와 여러분들이 안드레와 같은 주님나라의 멀티플레이로 충성스런 주님의 일꾼이 되길 원하신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의 음성으로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안드레와 같은 주님나라의 일꾼이 되면 좋지 않겠느냐?”
“자기 형제 베드로를 데려와 주님을 만나게 했고, 벳새다 벌판의 굶주린 군중을 먹이고자 할 때 예수님의 그 마음을 가장 먼저 헤아려 어린 소년을 주님께 데려왔던 안드레와 같은 일꾼 말이다.”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기 직전에 헬라인 그 이방인들도 주님께 데려와 구원의 주님을 만나게 해 주려 했던 그 안드레처럼 말이다.”
“안드레는 구약의 모세가 하나님나라를 받들 때 그 양 옆에서 떠받들던 아론과 훌 중에 훌과 같은 겸손한 인물이지 않더냐?”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나라와 하나님의교회를 위한 일꾼들 중에 안드레와 같은 일꾼을 필요로 하지 않겠느냐?”
“안드레는 가롯 유다와는 달리 주님께서 자신을 치켜세워주지 않아도 묵묵히 제 할 도리를 다한 일꾼이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님께서 너를 안드레처럼 필요로 하실 때 기꺼이 주님께 너를 내어드리면 좋겠구나.”
“주님께서 뭔가를 원하실 때 주님의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면 좋지 않겠느냐?”
“너의 형제와 친인척을 주님께 인도하고, 뭔가 궁핍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돕고, 세상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주님께 인도하는 안드레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서도 자기 이름값을 원했던 가롯 유다와는 달리 온전히 자기 이름값을 지우며 순종했던 안드레였지 않더냐?”
“모세를 받은 훌에게 그의 자손의 복을 주신 것처럼 안드레 역시도 그런 자손의 복을 주님께서 부어주지 않았겠느냐?”
(찬양)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에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손에는 주를 향한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자에게 순교자의 삶의 사는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8679122
(예화)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나라에 위대하게 쓰임받은 사람은 아는데 그들을 인도한 사람은 잘 모릅니다.
무디(D L Moody)는 세계적인 부흥사로 모두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무디를 전도한 사람은 ‘킴벌’인데, 그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스펄전은 설교의 황태자로서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전한 명설교가였습니다.
그러나 스펄전을 전도한 사람이 어느 이름 없는 노동자인데,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를 모세되게 한 인물이 아론과 훌인데, 아론은 이름이 많이 등장했지만 훌은 없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베드로를 전도한 인물이 안드레인데, 안드레는 늘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로 소개되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런 2인자요, 그런 멀티플레이와 같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교회를 세우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 목사님이 1872년 영국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열흘 동안 400명이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죠.
무디 목사님은 그토록 작은 교회에 대부흥이 일어난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선천적인 장애로 침대에 누워있는 ‘마리안 아들라르드’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매일 같이 이렇게 기도를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자는 장애가 있어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있어요.”
“하나님 우리 교회에 부흥을 보내주시옵소서. 우리 교회 예배 때 성령을 부어주시옵소서.”
바로 그 여인의 보이지 않는 중보기도를 통해 그 교회에 대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이 베드로처럼 활약했다면 마리안 아들라르드라는 안드레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발췌) 강준민 목사의 〈무대 뒤에 선 영웅들〉이란 책에서 발췌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듯 교회사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일꾼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세상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하나님나라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18세기 영국의 대각성 영적 운동 시기에 찰스 피니의 동역자인 다니엘 내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내쉬는 뉴욕 부근의 목회자로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분이었죠.
그는 찰스 피니처럼 설교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목회를 활발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때 그가 하기로 한 것은 48살의 피니가 집회를 인도할 때 그를 위한 중보기도자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피니가 어느 도시에서 집회를 한다고 하면 3, 4주 전에 미리 그 지역에 가서 방을 빌려 자신과 같은 이들을 모아 중보기도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피니가 집회를 하러 어떤 지역에 갔는데, 그곳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던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피니에게 와서 “혹시 내쉬를 아시나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쉬란 사람이 두 남자와 함께 어둡고 칙칙한 지하방에 하숙하고 있어요. 3일동안 음식을 대지 않고 있죠.”
“그런데 그들이 기거하는 방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어요.”
“가만히 방문을 열고 봤는데, 그들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3일이나 계속 기도하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그 하숙집 주인이 피니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분들에게 좀 들어가보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러자 피니는 그 하숙집 주인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네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들은 지금 기도 중에 해산하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피니는 자신이 약속한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집회가 시작되었는데, 내쉬는 그 집회에 참석한 군중들의 죄를 깨닫도록 성령님의 임재를 위해 강력하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1920년대에는 피니가 집회 가운데 공격을 당한 일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내쉬에게 더욱더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1826년에는 어느 도시의 갱단들이 피니와 내쉬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내쉬는 영적으로 견고한 진들이 파쇠되도록 더욱더 강력하게 기도했다고 하죠.
그러던 1831년 내쉬가 죽기 며칠 전에 그런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나는 확신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오순절에 강림했던 성령님을 간구하기를.”
“나의 몸은 지금 고통 중에 있지만 나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다.”
“나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믿으면 다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겨우 알 것 같다.”
그 편지와 함께 내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하늘나라로 소천했다고 하죠.
오늘날 내쉬의 무덤은 뉴욕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캐나다 접경지에 있다고 합니다.
물론 먼지 자는 도로 옆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덤인데 거기에 그런 묘비명이 쓰여 있다고 하죠.
“다니엘 내쉬, 기도의 용사, 피니의 동역자, 1775.11.17.-1831.12.20”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주는 것 같습니까?
찰스 피니가 가는 곳마다 대부흥의 집회를 경험케 된 것은, 그가 잘 나고 능력이 있어서 된 게 아니었던 것이죠.
찰스 피니가 빛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기도로 중보하며 동역한 내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쉬는 비록 찰스 피니에게 가려진 목회자였지만 그는 안드레처럼 주님나라에 위대한 사역자였습니다.
(내음성)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무디 목사의 집회를 위해 기도했던 마리안 아들라르드처럼 중보하며 살게 해 주세요.”
“저도 찰스 피니의 목회 사역을 위해 기도로 동역했던 내쉬처럼 살게 해 주세요.”
“내가 모세처럼 베드로처럼 전면에 나서지는 못해도 훌처럼 안드레처럼 묵묵히 중보하여 협력하는 동역자로 살게 해 주세요.”
“제가 목사님처럼 뜨겁게 설교하거나 복음을 전하진 못해도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묵묵히 기도하는 기도의 동역자로 살게 해 주세요.”
“그것이 안드레처럼 2인자로서 묵묵히 하나님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길인 줄 믿사오니, 그런 은혜를 충만하게 부어주세요.”
(찬양)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에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손에는 주를 향한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자에게 순교자의 삶의 사는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2494403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드레는 초대교회 때부터 ‘프로토클레토스’ 곧 ‘첫 번째로 불려진 자’란 영예로운 이름을 지닌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수제자가 못 됐어도 주님께서 따로 데리고 다니는 1인자는 못됐어도 모든 영역에서 멀티플레이처럼 헌신한 일꾼이었죠.
더욱이 안드레는 가롯 유다처럼 자기 이름값을 알아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았고 자기 욕망을 위해 충성한 일꾼도 아니었죠.
안드레는 주님께서 필요로 하신 부분이 있다면 먼저 알아차리고 헌신했던 그러면서 자기 이름값은 철저히 지워나갔던 존귀한 일꾼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그 일을 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일꾼이 되길 원하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 속에서 안드레가 멀티플레이처럼 충성했듯이 그리하여 하나님나라가 더욱 든든하게 세워졌듯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자손도 잘 될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최존귀한 영광의 상급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주일설교SundaySerm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영상설교]하나님은 누구신가(5)_20220529주일오후설교 (0) | 2022.06.01 |
---|---|
[동영상설교]그의 형제 안드레(마4:18-22)_20220529주일낮설교 (0) | 2022.05.29 |
성경기초교리(4)-하나님은 누구신가? (0) | 2022.05.25 |
[동영상설교]베드로라 하는 시몬(마4:18-22)_20220522주일낮 (0) | 2022.05.23 |
베드로라 하는 시몬(마4:18-22)_20220522주일낮설교 (0) | 2022.05.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