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 선 왕인 사울의 추격과 살해의 위협은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8년 넘게 다윗은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쳐 다녀야 했기 때문이죠. 미갈과 함께 살고 있던 집에까지 사울이 자객을 보내 다윗을 죽이도록 했는데, 그때 미갈이 남편 다윗을 창문을 통해 달아나도록 한 뒤, 그로부터 8년 넘게 사울의 낯을 피해 도망쳐 다녔죠. 그야말로 긴 긴 세월이요,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울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패해 죽게 되었고, 그때부터 다윗에게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죠. 물론 그것은 다윗 한 사람을 위한 지평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새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전사 이후 다윗은 유다 지파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고, 6년 가까이 난공불락의 성읍인 여부스 성읍을 점령한 뒤에는 명실상부한 모든 이스라엘 지파의 왕이 되었죠. 그때부터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 국가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확장과 부흥기를 주도하게 되었죠. 이른바 다윗 왕조가 시작되면서, 다윗은 주변 이방 족속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는 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죠. 물론 그 정복 전쟁은 다윗 자신의 야망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언약의 성취과정이었죠.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어떤 족속과 전쟁을 치르던지 이기게 해 주셨고, 그때마다 다윗은 전쟁의 전리품을 자신이 취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드렸죠. 그 전쟁의 공로로 하나님께 돌렸던 것입니다. 그 정복전쟁에서 다윗은 블레셋을 필두로, 모압, 소바, 아람, 암몬, 아말렉, 그리고 에돔 족속들을 복속시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60편은 에돔과 전쟁을 치른 그 상황 속에서 쓴 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표제가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만 이천 명을 죽인 때에”라고 돼 있기 때문이죠.
그와 같이 아람 나라의 군사 1,2000명을 물리친 사건은 사무엘하 8장 13절에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금 역사를 정리하면서 편집한 역대상 18장 11절에도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죠. 중요한 것은 사무엘하 8장이든 다시 편집하여 기록한 역대상 18장의 내용이든, 에돔을 정복한 승리에 대해 성경은 한 두 절로 짧게 기록하고 있는 점입니다. 파죽지세로 밀어 붙힌 이스라엘의 대승이었다고 말이죠.
그렇다면 어떻겠습니까? 본문을 쓴 다윗도 왠지 기뻐하고, 승리감에 도취돼, 하나님을 연신 찬양하는, 그런 시로 써내려가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미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고, 하나님께서 가는 곳마다 전쟁의 승리를 보장해 주시는데, 이번에도 에돔과 전쟁을 치르는데 그들의 군사 1만2천명을 물리쳤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승리한 것이라고, 기뻐하며 환하하고 열광해야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미 읽은 시편 60편의 내용들을 읽어볼 때 과연 기쁨과 환희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까? 아니죠. 오히려 침울하고, 뭔가 하나님께서 당사자들을 버리지 않았는가, 할 정도로, 기분이 별로 좋지 않는 고백으로 써 내려간 것임을 알 수 있죠. 한 마디로 말해 승리의 기쁨과는 거리가 먼 패배와 낙심 속에서 쓴 탄식의 시라는 점 말입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의 불빛보다는 그 뒤에 가려진 쪽방과 달동네의 빈민촌의 모습을 비춰주는 것 같은 느낌 말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웅장한 다윗의 정복전쟁 역사 속에 가려져 있는 다윗의 내면, 곧 다윗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윗은 본문 1-3절을 통해 전투의 패배에 대한 참담함을 그렇게 고백하죠.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1만2천명을 몰살시킬 정도로 대승을 거둔 다윗이지만 그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좌절과 패배의 내면을 고백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마치 엘리야의 모습과 비견되는 내용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벌이지 않았습니까? 그 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과연 하늘에서 불로 응답하는 신이 누구인지, 대결을 벌였고, 그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제물을 잡아 놓고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온갖 쇼를 다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몸을 칼로 상처를 내면서까지 별 짓을 다 해봤지만 그들의 신은 응답이 없었고, 엘리야가 드디어 나서서 무너진 단을 수축하고, 그 제단 주위에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서, 온전히 하나님의 응답을 바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살라버린 역사를 펼쳐보여주셨죠. 그야말로 850대 1의 승부수에서 엘리야가 대승을 거둔 사건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던 그 무렵에 엘리야가 무엇을 합니까?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려는 왕비 이세벨의 낯을 피해 광야로 도망쳤고, 그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 나무라고 할 것조차도 없는 싸릿빗자루나무처럼 가냘픔 그 로뎀나무 아래의 그늘에 피해,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지금 다윗의 모습이 그와 똑같다는 점입니다. 남들은 에돔 군사 1만2천명을 쳐 죽여서 기뻐하고 춤추고 찬양하며 날뛸지 몰라도, 다윗의 내면은 오히려 패배자의 모습처럼,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 그래서 1절에 “우리를 회복시켜달라고”, 3절에서는 우리가 포도주를 마신 것처럼 “비틀거리고 있다”고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있는 모습이죠.
과연 대승을 거두고서도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아뢰고 있는 것, 달리 보면 그토록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도, 그래서 수많은 간증과 체험이 있어도, 그 승리의 뒤안길에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결코 전진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만2천명을 무너뜨린 대승을 거둔 직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지 않으면 흩어지는 모래알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다윗이 절감한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깨달은 다윗이었기에, 본문 6-8절을 통해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들의 소유권을 기꺼이 주장하실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하셨도다"
이전에 이방 세력들의 정복 전쟁을 펼쳐나갈 때, 블레셋을 필두로, 모압, 소바, 아람, 암몬, 아말렉, 그리고 에돔 족속을 하나씩 정복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 까닭이었는데, 당연히 그 모든 나라뿐만 아니라 지금 자기 나라의 땅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오늘 우리들에게 성령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다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네가 뭔가 큰 승리를 거뒀다고, 만족감 속에 교만하지 말고, 너희 뒤에 항상 도움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 그렇기에 매사에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소유권을 하나님께 두며 살라는 것이죠. 어떤 승리에 자축하고, 어떤 패배에 슬퍼하는 그런 일희일비하는 인생보다 매사에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실존을 바르게 인식하게 될 것이고, 매일매일 “주님 나를 회복시키소서" 하며 겸손하게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2142807
*사랑하시는 주님. 지금 내가 영광의 정점에 서 있든지, 아니면 승리의 뒤안길에서 절망 속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든지, 주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과 함께 동행하므로 승리하는 하루의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복된 하루가 도게 해 주시옵소서.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시63:1-11) (0) | 2022.05.23 |
---|---|
내 마음이 약해질 때(시61:1-8) (0) | 2022.05.20 |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59:1-17) (0) | 2022.05.18 |
올바르게 판결해야(시58:1-11절) (0) | 2022.05.17 |
주의 영광이(시57:1-11) (0) | 2022.05.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