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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59편의 표제를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라고 말이죠.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믹담’이란 ‘돌에 새긴 글’ 곧 은신처에 숨어서 쓴 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어떤 상황에서 쓴 시인가?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라고 돼 있습니다. 사무엘상 19장 8-18절의 상황에서 이 시를 쓴 아닌가 하고 추정을 할 수 있죠. 그 때가 언제인가?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리자, 온 백성들이 그런 노래로 다윗을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도 하고 말이죠. 그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경계하게 되죠. 그러면서 사울에게 악귀가 들렸을 때 그 악귀를 좇아내고자 다윗이 수금을 타는데, 수금 타는 다윗을 향해 사울이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죠. 그도 안 되자, 사울이 꾀를 내죠. 블레셋 군대를 죽이면 다윗에게 자기 딸과 결혼하여 사위를 삼겠노라고 말이죠. 그래서 다윗은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불레셋 군사를 다 쳐부쉈고,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하여 사울의 사위가 되기도 했죠.
하지만 점점 더 민심이 다윗에게 기우는 것을 알게 된 사울은 다윗을 저대로 살려둬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을 하죠. 그래서 최측근 군사들을 동원해 다윗을 죽이도록 다윗이 머물고 있는 집, 곧 자기 딸 집으로 군사를 보내죠. 그때 사울의 딸이 그 소식을 접하고, 다윗을 창으로 달아내려 피하도록 하죠. 그리고 그 집의 침대에는 우상 단지를 덮어서 마치 다윗이 잠자고 있는 것처럼 꾸몄고, 군사들이 쳐들어오자, 지금 다윗이 병들이 누워있다고 거짓말을 하죠. 그러자 사울이 침상 채 다윗을 잡아 오도록 명령하는데, 이미 그때는 다윗이 사무엘의 고향 땅인 라마로 달아난 뒤였죠. 바로 그런 급박한 상황, 사울의 최정예부대가 다윗의 목숨을 옥죄여 오는 그 상황에서 쓴 시가 본문의 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나의 원수’란 블레셋이나 외적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노리는 장인 어른, 곧 사울이고, 사울의 지시를 받은 최정예부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사울이 다윗을 향해 원수처럼 대합니까?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노리기라도 했습니까? 아니면 사울의 지위를 넘보며 사울을 조롱하고 무시하기라도 했습니까? 결코 그런 적이 없었죠. 오히려 다윗은 사울에게 최고로 좋은 신하여 장수요 호위무사였죠. 그런데도 자기 딸과 결혼한 다윗이 백성들의 민심을 사고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사울이 스스로 다윗을 경쟁자로 여겨, 지금 죽이려고 드는 것 아닙니까?
다윗은 아무런 원수를 만든 적이 없는데, 사울이 스스로 원수를 만들고 있는 격이 된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곧 ‘사울의 손에서 나를 건져주소서’하면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죠.
그 원수에 대해 2절에서는 두 가지로 설명을 하죠. “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나는 ‘악을 행하는 자’, 또 다른 하나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 그것이 곧 원수의 특징, 사울의 특징이라는 점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 그것이 악을 행하는 자요, 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것, 그것이 곧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것은 다윗이 잘못을 행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3절에서 밝혀주고 있죠.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이죠. 여기서 주목할 것이 ‘나의 잘못’으로 번역된 ‘페사’(pesa)입니다. 이는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역’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명을 보장해주고 붙들고 있는데 어찌 감히 자기 분노를 이기지 못한 사울이 그런 하나님의 뜻을 꺾고 짓밟으려고 하느냐는 것이죠. 그만큼 다윗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그런 탄원의 기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수많은 비방과 모욕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과연 그렇게 조롱받고 모욕을 받아야 할 큰 죄라도 지었습니까? 십자가에 처형당하셔야 할 이유가 예수님에게 있었습니까? 요한 1서 3장 5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시려고, 받으신 것이었죠. 바꿔 말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독생자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통로가 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죠.
본문의 다윗도 그와 똑같은 격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특별히 잘못한 게 없고, 죄악을 범한 게 없고, 살해당해야 할 위험 요소를 퍼트린 게 없고, 국가 전복이나 반란을 주도한 게 전혀 없는데도, 다윗의 목숨을 사울이 노리고 있다는 격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다윗의 목숨을 노리고,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어떻게 된다고 표현합니까? 14-15절입니다. “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그들이 밤새도록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그 집을 지키고, 그의 길목을 지킨다 해도, 헛수고 하는 것뿐이라고 고백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계획을 세우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유유히 그들의 길목을 헤치고 사라져버리지 않았습니까? 더 나아가, 그들이 설령 예수님을 체포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해서,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그들에게는 끝난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온전한 능력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십자가는 아무런 힘이 없어 보였고, 저주의 상징처럼 보였을지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 곧 부활의 시작임을, 그 원수들은 몰랐죠.
지금 다윗이 사방으로 포위되고, 우겨쌈을 당하여 졸지에 생쥐꼴이 되어, 빠져나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포위된 그 상황이 실은 부활의 시작임을 알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장인 어른은 사위를 죽이려고 포위하고 있지만, 장인 어른의 딸 미갈은 그런 사위를 위해 창문으로 줄을 내려 다윗에게 새 길을 열어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17절에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미갈을 통해 그 막힌 길을 열어주셨으니,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만약 이때 미갈이 그런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지 않았다면, 미갈의 마음에 하나님의 감동이 없었다면, 어찌 다윗이 그 길목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미갈을 통해 마음에 감동을 주신 분이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다윗이 찬양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의 삶의 자리가 애매히 고난을 받는 자리인가? 다윗처럼 우껴쌈을 당하는 자리인가? 꼼짝달싹 없이 얽매인 삶의 자리인가? 그러나 설령 그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일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부활의 새 길, 승리의 새 길을 열어놓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 부활의 길을 만나기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이죠. 그 기간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리 새 길을 만나도 새 길이 아닌 게 되죠. 다윗이 그 뒤로 8년이라는 도망자 세월을 죽음의 자리일지라도 잘 견뎌냈기에 그 뒤에 유다 지파의 왕으로, 또 그 위에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온 지파의 왕으로 추대 받았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렇기에 지금 고난 당하는 현장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의 길임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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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생각하며 사는 신앙인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게 하시옵소서. 다윗이 우겨쌈을 당해도 낙심치 않았던 것처럼, 어떤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좌절치 않게 하시옵소서.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놓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목격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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