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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올바르게 판결해야(시58:1-11절)

by 똑똑이채널 2022.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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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8편의 표제를 보면 이 시가 다윗의 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믹담 시라고 기록돼 있죠. 시편의 표제 중에 ‘믹담’시라고 기록돼 있는 시는 총 6편이 있습니다. 시편 16편을 비롯해 시편 56편-60편까지의 시들이죠. 히브리어 ‘믹담’은 ‘덮는다’의 의미를 가진 아카드어 ‘카타무’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지만, 70인역에서는 ‘비석에 새겨진 글’ 곧 ‘돌에 새긴 시’가 곧 믹담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시편 58편도 실은 57편처럼 사울 왕을 피해 은신처에 숨어 있을 때 쓴 시이지 않나 추정하죠. 더욱이 시의 내용조차도 다윗이 절대권력을 누리던 왕으로서 쓴 시가 아니라 오히려 통치자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시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1-2절을 통해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통치자들을 지적합니다.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여기에서 ‘인자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사람의 아들들’입니다. 이 ‘인자들’은 죄 성을 지닌 인간의 자손들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그런 죄성이 가득 찬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2절에서는 악행을 저지르는 통치자들이 마음에 악한 일을 꾸미고 그 마음의 품은 악을 결국 행동으로 옮겨 폭행을 일삼는다고 고발하죠.

이러한 악인들의 행태는 3절과 4절과 5절에 언급하고 있듯이, 모태에서부터 죄 성을 지닌 악한 자입니다. 그런 자들은 술사의 소리나 술객의 요술에도 전혀 요동치 않는 ‘위험한 독사’로 비유하고 있죠. 독을 가진 독사가 술사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주위 환경이 매우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악한 자들, 위험한 독사와 같은 자들의 악행에 대해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직접 행동으로 대항하지 않고 하나님께 호소하죠. 6절에서는 악인이 위험한 존재이지만 이빨 빠진 사자와 같은 무기력한 존재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고, 7절에서는 흐르는 물같이 급히 사라지는 소멸될 존재와 부서진 화살처럼 무기력한 존재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고, 8절에서는 소멸하는 달팽이처럼, 그리고 출생예정인 태중에 아기가 유산되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함같이 소멸되기를 소원하고 있고, 9절에서는 가마를 뜨겁게 할 수 있는 가시나무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바람에 휩쓸려감같이 소멸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한 자를 맞서 악한 방법으로 대항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칼은 칼로 맞서면 결국 똑같이 악한 자가 되고 말기 때문이죠. 그런 폭력적인 방법보다 비폭력 저항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훨씬 지혜롭다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나아갔던 다윗의 태도죠.

다윗이 그런 마음과 자세, 곧 비폭력 저항으로 하나님께 호소한 것은 말씀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신명기 32장 35절의 말씀을 늘 새기고 있던 까닭이죠.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하나님께서 분명코 악한 자들을 보복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것, 그것을 다윗이 묵상하고 있었기에, 지금 자신을 위협하는 원수들 앞에 똑같이 맞서지 않고 비폭력 저항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며 나아간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평소 우리 자신이 말씀의 사람인가, 그렇지 않는가,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취하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겠죠. 그런데 다윗은 평소 하나님의 말씀, 곧 모세 5경을 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께 그 보복과 심판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것은 신약시대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죠. 바울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이들을 향해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롬12:19)고 권면하기도 했죠.

 

오늘 시편 58편의 시는 다윗의 다른 탄원시와 특별한 차이점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 이 새벽에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정의’로 번역된 히브리어 ‘짜디크’는 그 번역이 쉽지 않아 하나로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짜디크’를 언급할 때 그와 유사한 ‘미쉬파트’가 종종 언급이 되죠. 그만큼 두 단어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짜디크’를 ‘정의’로, 그리고 ‘미쉬파트’를 ‘공의’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짜디크’를 ‘기초정의’라 부르기도 하고, ‘미쉬파트’를 ‘교정정의’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두 단어를 포괄적으로 통합해서 ‘정의’라고 칭하죠.

창세기 18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의와 공도’에 대한 부분을 말씀하시는데, 그 원어가 바로 ‘짜디크’와 ‘미쉬파트’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정의는 무엇이고, 또 공의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정의는 모두에게 두루 통용되는 공의이고, 하나님의 정의는 장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정의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한다면 그것은 공의가 아니라는 것이죠. 정의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정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와 공도’ 곧 ‘정의와 공의를 행하길 원하시죠. 그렇다면 정의를 행한다는 것이 내가 직접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는 일일까요? 아니면 불의와 맞서 싸우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정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곧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정의와 공의’는 사랑과 동떨어진 개념이 결코 아닌 것이죠.

 

다윗은 본문을 통해 통치자들에게 정의를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돈과 권력이 없는 사람이 정당한 판결을 받지 못한다거나, 힘이 없는 자가 악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는데도, 통치자들이 방관하고 침묵하는 것, 그것은 정의를 행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도 강도 만난 자의 이웃(눅10:30-37)이 등장합니다. 만약에 강도의 출몰이 잦은 곳에 피해자들이 속출하는데도 통치자가 그것을 방관한다면 그 통치자는 정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죠. 강도를 만난 자가 평범한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이었다거나, 어떤 권력자의 가족이기 때문에, 통치자가 즉각적으로 범인색출에 나섰다면 그것 역시 정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방치하고, 힘이 있기 때문에 즉각 행동에 나서는 것은 결코 공의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은 오늘 본문의 시편 58편을 통해, 통치자들이 정의를 행했다면 악인이 무죄자들을 억압하거나 폭행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하죠. 오늘날도 그렇죠. 정의가 행해지는 사회라면 약자의 인권을 짓밟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힘 없는 사람이 요구해도 듣지 않던 사람이, 권력자가 요구하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그 일에 뛰어든다면, 과연 그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정의와 공의는 통치자들이나 권력자들이나 정부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하죠. 작은 사회, 작은 공동체, 그리고 가정에서도 똑같이 적용돼야 할 부분입니다. 누군가 정의를 행하지 않음으로 인해 피해자가 억울해 한다면, 그 억울함을 어찌 하나님께 듣고만 계실까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속한 단체나, 가정, 내 일터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능동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죠. 내가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게 결코 아니죠. 불의한 일 앞에 잠잠하는 것은 그것을 묵인하고 동조하는 일에 불과하죠. 내 이웃이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면 기꺼이 그 일을 돕는 것, 그것이 적극적인 정의를 구현하는 자이죠. 예수님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를 돕는 것, 그것이 정의를 시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런 자를 내팽개친다면 오늘 본문의 1절에서 말한 조용한 통치자들과 무엇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은 정의를 행하는 자들이 아니었죠. 오히려 그를 들쳐 엎고 여관으로 간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자였습니다.

 

오늘 하루도 내가 속한 곳곳에 이 땅에 정의와 공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환경과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진정한 의와 공도, 정의와 공의를 행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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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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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정의를 행하도록 저희를 택하여 주시고 불러주심 감사드립니다. 이 땅에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자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주변의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도와주는 적극적인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속한 곳곳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드러나도록 인도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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