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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55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1-8절이 압제에 신음하는 다윗의 호소와 탄식을 보여주고 있고, 9-15절은 동료의 배반과 악행에 대한 고발과 저주를, 16-19절이 하나님의 기도응답과 보응에 대한 확신을 그리고 20-23절이 배신자에 대한 재고발과 하나님의 보응에 대한 확신의 재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1절을 통해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다윗의 간구죠. ‘귀를 기울이시고’, ‘숨지 마소서’라고 거듭 반복하면서,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가죠.
왜 그랬을까요? 그만큼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를 버리시고, 외면하신 것처럼, 당시 그가 처한 상황이 고통스럽고, 암담한 상황임을 그의 탄식이 반증해 주는 것이죠.
반면에, 다윗의 그 간구는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 된다는 다윗 믿음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분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간곡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표제에는 저작 배경이나 시기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본문이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친구이자 모사꾼이었던 아히도벨의 반역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고 추정을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기도가 얼마나 더 급박하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 올린 기도인지 알 수 있는데, 4절에서는 ‘사망의 위험’이 이르렀다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정확한 히브리어 표현은 ‘사망의 위험들’이라는 복수형태입니다. ‘위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공포’나 ‘무시무시한 전율’을 뜻하는데, 그것도 복수형태로, 겹겹이 밀려드는 공포와 무서움을 다윗을 옥죄여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망’은 모든 두려움의 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복수형태로 사용하여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혹독한 공포가 사면에서 휘몰아치는 듯한 모습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반역으로, 제대로 손 한번 쓸 수 없었고, 압살롬의 군사들에게 추격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표현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군사적인 정황상으로도 압살롬의 군대가 훨씬 우위에 있고, 이전에는 다윗의 부하 장수이자 친구요 다윗이 모사꾼이었다가 압살롬이 반역을 할 때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의 모사꾼이 된 아히도벨이 계략을 꾸몄으니, 속속들이 다윗의 속을 환히 알고 있는 그 아히도벨의 계략이 채택되기라도 하면, 다윗은 그야말로 죽은 목숨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다윗으로서는 더더욱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아히도벨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윗은 본문 12-13절을 통해 자신을 압제하는 대상이 원수가 아닌 동료였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여기에서 ‘동료’라고 표현된 히브리어 단어는 ‘자신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자’, ‘왕인 자신처럼 존귀한 자’, ‘자신의 분신’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 ‘친구’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친하다’라는 뜻과 함께 ‘가르치다’는 뜻을 지닌 동사로부터 유래한 명사 곧 ‘친밀한 자’란 의미와 ‘가르치는 자’란 의미가 내포돼 있습니다. 그리고 ‘친우’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다는 ‘알다’라는 동사로부터 파생된 단어인데, 여기서 ‘알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앎이 아니라 부부지간의 앎을 의미하는 매우 인격적인 앎을 나나태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다윗과 깊이 있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눴으며, 다윗에 대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을 정도로 매우 친밀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압살롬의 모사꾼으로 변신한 아히도벨이 그런 자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속 생각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모략가였던 아히도벨이 그렇게 다윗에게 등을 돌렸으니, 얼마나 큰 충격에 빠졌겠습니까?
그런데 16절은 그런 다윗의 기도에 일대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런 충격적인 상황에 빠진 다윗이 그 모든 상황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기로 다짐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도할 것이라고 결심을 하죠.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여기에서 ‘부르짖으리니’ 하는 동사는 ‘미완료형’으로서 계속해서 기도해 나갈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불어닥친 상황 앞에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분노와 원망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에게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토로하는 기도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가 이와 같이 대반전을 이룰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과거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도움이 되셨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죠. 골리앗의 칼날에서도, 사울의 칼날에서도, 수많은 대적들의 위협 속에서도, 그 많은 포위망 속에서도 새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자신의 친구이자 모사꾼인 아히도벨이 등을 돌려 최대위기를 맞이했지만, 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새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고 간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맡긴다’는 단어의 원형은 ‘던지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어깨에 매고 있던 자기 짐을 내어던진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자신과의 분리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실 은혜에 주님, 오직 예수. 바로 그런 찬송의 가사처럼, 다윗이 자기 짐을 주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고백을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인용하신 바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 그 짐을 맡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신다고 고백합니까? 본문 22절 하반절에 그렇게 고백하죠.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다윗이 그렇게 고백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는 분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요동하지 않도록, 흔들리지 않도록,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대가 되어 주시고, 넘어지지 않도록 힘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다윗의 이런 기도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은 훗날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게 되죠. 아히도벨은 압살롬과 많은 신하들 앞에서 자기 계략이 거절당하게 되자,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스스로 목을 끊고 말이죠. 그것이 우리가 이미 읽은 사무엘하 17장 23절에 나온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도 요압의 병기 맡은 자들에 의해 전장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죠.
바로 그런 모습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비쳐지는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저히 우리의 상황에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나냐는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 내 인생의 수렁에서,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놓임 받도록 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어떤 위협과 공포와 고통이 밀려올지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매달리며 간구하는 것이죠. 더욱이 가장 믿었던 친구요 또 아랫사람에게 치명적인 배신을 당했을 때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방법으로 새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심을 우리들의 눈으로 목격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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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우리가 고난과 두려움 속에 있을 때 그것을 주님께 맡길 수 있도록 말씀으로 붙들어 주시옵소서. 주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소중하게 듣고 계심을 깨닫게 하사 가장 큰 분노와 아픔 속에서도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로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옵소서. 기도로 무릎 꿇을 때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과 위로와 생명이 되심을 맛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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