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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보통 지혜서로 분류가 됩니다. 삶을 어떻게 영위해 나가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세기의 기독교 교부인 아타나시우스는 시편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영적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른바 “대부분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지만 시편은 우리를 위하여 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시편 53편은 ‘다윗의 마스길’ 이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교훈을 목적으로 쓴 시라는 것이죠. ‘마스길’이 곧 교훈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선명하죠. 목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생의 기쁨(喜)을 누리기도 했고, 맏아들 암논이 딸 다말을 강제로 욕보이는 사건을 경험하며 노여움(怒)에 떨기도 했고, 장인 사울과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 다니는 처량한 슬픔을 겪기도 했고, 절망과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시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樂)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극명한 삶의 희노애락을 겪은 그가 오늘 읽은 시편을 통해 ‘지혜’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의 종국(終局)은 또 어떻게 되는지도 알려주죠.
본문 1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지혜와 어리석음의 구분점은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못하고 있느냐’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마음과 영혼에 각인하며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인생이지만,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계시지 않는 것처럼 자기 판단과 자기 욕망을 쫓아 사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칭하죠. 그렇게 어리석은 자의 삶은 1절 하반절에 표현하는 것처럼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공의와 정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등으로 점철된, 악을 도모하는 삶을 일관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비롯한 세계 각 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범죄와 만행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부재’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죠.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 했더라면 결코 그런 악행을 자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지혜’란 인간의 일생이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곧 하나님께로부터 평가받는 삶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알고 있는 사람은 욕망과 탐심을 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깨닫고 사는 자는 결코 헛된 탐심과 욕망을 구하기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죠. 왜냐하면 그것이 썩고 없어질 순간의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현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각이 있는 자’ 곧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자’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찾는 자’ 곧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굽어 살피신다’는 히브리어 본 뜻은 ‘아주 면밀하게 자세히 살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세상 속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며, 하나님을 온전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에 대한 본문의 대답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본문 3절에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온전히 경배하는 예배자, 그리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는데 실은 ‘한 사람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이 표현은 정말 한 사람도 없다는 결정론적인 의미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모습으로 산다는 뜻이죠. 그만큼 죄악된 길을 걷고 있는 인간의 보편성을 부각시키는 표현입니다.
최근 한국 투명성 기구가 15-30세인 1031명의 청소년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부패 행위를 알아도 ‘신고하지 않겠다’고 대답한 비율이 무려 41%였습니다. 이유는 ‘효과가 없을 것’이란 답이 59%였습니다. 그만큼 젊은이들조차도 우리 사회가 점점 부패와 탐욕 속에 타협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셈이죠. 그만큼 무감각한 사회로 치닫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죄는 막강한 파급력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처음에 자신들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그들의 행동이 점차 유혹의 손길로 다가온다는 걸 말입니다. 그러다가 분별력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동요되고 함께 불의 삶을 살게 되죠. 그런 연쇄적인 죄의 파급력은 급기야 의롭던 사람조차도 죄악에 넘어지고, 급기야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선한 사람들까지도 악용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존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인식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런 죄악된 길을 걷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소수의 남은 자’들 아닙니까? 이른바 이사야 시대에 일깨워주는 그루터기들 말입니다. 우리가 남은 자요, 그루터기라면, 우리는 결코 세상 사람들의 악한 길을 좇아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선이 악을 이긴다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모든 생명을 살린다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사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오늘 본문 4-5절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삶의 행태와 결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사실 그 어느 때나 그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자기 힘과 능력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님의 사람들 조차도 괴롭히는 어리석은 자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열왕기하 18장 13절 이하에 등장하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남유다 침공이라 할 수 있죠. 산헤립 대왕은 자신의 힘을 믿고 남유다를 침공했습니다. 그 일을 랍사게 장군에게 위임했고, 그는 히스기야에게 그렇게 통보했죠.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져내겠느냐?”하고 말이죠. 하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까지 완전 개무시하는 모습이었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진영의 군사 185,000명을 하룻저녁에 송장이 되게 하셨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경멸한 결과였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마련입니다. 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산헤립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까지 힘들게 하고, 이유 없이 억압하는 이들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악은 악으로 갚아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윗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칼날 앞에 똑같은 칼날로 맞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오직 악의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고, 묵묵히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 끝 부분에서, 본문 6절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하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히10:30), 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아무쪼록 살아계신 하나님,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아뢰며 잠잠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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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오늘도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고백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순결하고 바른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를 통해 삶으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입증하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시고, 저희 삶 속에서 생생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오늘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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