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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50편은 ‘아삽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아삽은 ‘베레갸의 아들 아삽’으로서 레위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윗 시대 때 성전 찬양대의 우두머리로 활약했음을 역대상16장 4-5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 아삽의 시는 오늘 읽은 시편 50편과 더불어 시편 73편에서부터 83편까지 총 12편의 시들이 아삽과 그 후손들이 성전 예배용으로 지은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의 시편이 이사야서 1장 11-20절 그리고 미가서 6장 6-9절의 내용과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흡사하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제물을 가지고 성전을 찾아 나오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눈을 가리고자 하는 제물이라는 점이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천천의 제물이나 만만의 제물이 아니라 상하고 통회자복하는 제사라는 점,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읽은 시편과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이사야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가 아삽의 시를 읽고 깨달아서 다시금 자신들의 기록에 인용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왜냐하면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는 다윗과 아삽이 죽은 뒤 250년 뒤에 각각 이사야서와 미가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아삽의 시를 참조하고 재인용했을 수 있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이사야 선지자든, 미가 선지자든 그리고 그 이전의 아삽이든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제물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자의 제사라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미가 선지자도 그렇게 읊조렸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그래서 오늘 읽은 시편은 아삽이 성전 예배용으로 지은 시인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 하나님을 눈속임용으로 제물만 드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졸지에 기름부음을 받고, 8년간 도망자 신세를 겪다가, 사울 왕이 죽자, 30살에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어 10년 가까이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면서 이스라엘 전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명실상부한 왕이 되고자 노력했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다윗을 40세가 되어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온 전역의 왕이 되게 해 주셨는데, 그런 다윗이 왕이 되어 맨 먼저 생각한 게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던 자였기에 하나님의 법궤와 성전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차츰차츰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해 먼저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오려고 했고, 그 뒤에 뭔가 안정이 되고 나라가 평안할 때 성전을 짓고자 했었죠. 물론 법궤를 모셔올 때 불행을 겪기도 했었죠.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오는데 웃사와 아효가 거드름을 피우는 바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셨고, 그때 다윗은 그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3개월 가량 다시금 법궤를 오벳에돔의 집에 놔 두었는데, 3개월이 지나 다시금 그 법궤를 모시고 올때에는 법궤를 수레에 끌고 오지 않고 레위인들로 하여금 법궤를 매고 오도록 했고 그때 아삽을 비롯한 레위 찬양대원들을 모두 동원했죠. 수금과 비파와 나팔을 불고 온 찬양대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 법궤를 어깨에 메고 오도록 말이죠.
오늘 본문을 기록한 아삽이 그 일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웃사와 아효처럼 하나님의 법궤를 무시한 자들이 어떻게 심판을 당했는지, 어찌 잊을 수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모습들을 똑똑히 목격한 아삽이었기에, 훗날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그 법궤를 지성소 안쪽에 안치할 때 아삽의 후손들은 또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을 전을 받들어야하는지를 아삽으로부터 새기고 또 새겼겠죠? 그런 마음과 자세를 우리가 생각한다면, 오늘 본문의 아삽이 무엇을 강조하며 이 시를 썼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삽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부르셨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시온으로부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시온에서 하나님의 빛을 비추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시편 48편을 읽을 때도 시온성에 관한 언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이 여부스 족을 몰아내고 시온 산 위에 다윗 성을 세우면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다고 말이죠. 그 뒤에 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 곧 자신들을 지칭하는 시적인 명칭이 되었고, 그들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와 로마에 의해 자기 나라가 멸망당한 후에는, 넓은 의미로 그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시온으로 생각하게 되었죠. 그것이 훗날 시온주의로 발전하여 그들의 신앙과 조국 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팔레스타인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건국하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 그 봄이 해방을 바라는 것인데, 시편의 시온 성이 바로 그런 의미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온에 빛을 비추시는 주님을, 3절부터는 심판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3-6절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하나님께서 판결코자 하늘과 아래의 땅에 선포하고 성도들을 모으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공의를 선포하시고 심판장으로서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을 향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7-22절에 그 심판의 내용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제사의 제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사야서 1장 11-20절 그리고 미가서 6장 6-8절의 말씀과 똑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이른바 하나님의 전에 제물을 가져와 하나님께 번제물을 드린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악한 자의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도둑과 연합한 제물이요, 간음한 자와 동료로서 드리는 제물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7-20절에서 그걸 밝혀주고 있습니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하나님 앞에 온갖 제물을 가져오는 것 같지만, 그것이 눈속임하는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는 그런 죄악들을 범하면서,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짓밟고, 정의도, 인자함도, 겸손함도 묻어나지 않으면서, 제물만 하나님께 가져온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 받으시겠느냐는 것이죠. 그렇게 하고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걸 아삽이 자기 죄처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고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께 진정어린 감사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하는 자의 마음과 자세라는 것, 그런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런 자들은 분명코 그 삶의 행위도 선과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 어찌 기뻐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내 삶의 예배에서 위선적인 부분은 없었는지 헤아려보는 하루가 되실 때 우리의 예배는 위선이 아니라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감사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삶의 행위 속에 공의를 행하며, 자비를 베풀며, 사람을 겸손하게 사랑하는 자의 삶을 펼쳐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의 기도와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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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오늘 우리의 삶의 예배가 말과 행동이 따로인 위선의 모습은 아니었는지요? 말과 행동이 하나인 언행일치의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올바른 길을 걸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목도하는 복된 삶이 되길 원합니다. 매 순간 정직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자비를 베풀도록 인자함을 더해주시고, 늘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는 산 제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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