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 새벽기도회 때 살펴본 말씀이 시편 37편이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인생즐 주관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비춰서 의인과 악인의 대조되는 모습을 읊조린 시였죠.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자기 힘과 능력만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죠.
그러나 의인은 도덕적으로 의롭지 못해도 자기 힘과 능력과 지식을 자랑치 않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자죠.
더욱이 의인은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를 향해 나누고 베푸는 자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자는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아래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나누고 베풀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죠.
다윗이 부족함 가운데서도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온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붙들어주셨는지 이렇게 고백하죠.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깨달음)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이웃을 향해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지닌 자를 하나님의 손으로 붙드신다는 것이죠.
다윗이 목동으로서 양을 칠 때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건져내주신 것도 여호와의 손으로 붙들어주셨기 때문이죠.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물맷돌로 쓰러트리고 그의 목을 벤 것도 여호와의 손을 붙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울 왕의 시기심에 의해 8년간 광야를 도망쳐다닐 때도 그가 넘어질 것 같지만 완전히 엎드러지지 않은 것도 그랬죠.
하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렵지 않게 해 주신 것,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손길로 붙들어주신 거죠.
(적용)이것은 오늘날도 다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 연약함과 무능함을 고백하며 무릎을 꿇고 예배할 때 어찌 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긍휼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자를 어찌 하나님의 손길로 붙들지 않겠습니까?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100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들을 더더욱 그렇게 품으시는 주님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대통령도 자신을 애쓰고 힘쓴 자를 장관으로 지명할 정도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애쓰고 힘쓴 자를 하나님의 손길로 붙드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제 밀레도 도착해서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고별설교를 나누었습니다.
바울이 지난 3년 동안 눈물과 수고로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애쓴 것들을 여러분들이 다 안다면서 말입니다.
지난 3년간 에베소교회에서 힘쓴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주님 앞에 돌아와 회개하여 영생을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했죠.
그를 위해 모함도 받고 억울한 일도 있었지만 모든 일을 주님의 복음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섬겼노라고 말이죠.
그리고 이제는 예루살렘에 가서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안디옥교회에서 평안히 남은 여생을 목회하면서 보낼 계획이었다고 했죠.
하지만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오면서 주님과 독대하면서 기도하는데 성령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환란과 결박을 말씀하셨죠.
그래서 다들 만류하지만 자신이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했죠.
그리고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파수꾼으로 살아왔기에 모든 이들의 피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까지 밝혔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에베소에서 3년간 목회한 모습을 상기시킨 것은, 이제 남은 여러분들, 에베소교회의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된 이들이 그 본을 따르기를 원해서 한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이 마지막으로 강조한 게 무엇이었습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에베소교회에 이단 사이비들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 성도들을 유혹할 수 있으니 경계하라는 거죠.
또한 에베소교회의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된 이들이 성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주님 뜻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죠.
그만큼 교회의 먼저된 자들 충성되고 헌신된 자들이 이단 사이비들로부터 보호자가 되어주라는 뜻이죠.
아울러서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된 이들이 스스로를 항상 비우며 겸손한 본을 보여주며 살 때,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갈 수 있다는 권면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에베소교회 장로들, 에베교회의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된 이들 앞에서 고별설교를 다 나눴죠.
그리고는 바울이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고, 다들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울면서 헤어졌죠.
(본문)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인 오늘 본문 1절 말씀인데,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원해)여기에서 ‘작별하다’는 헬라어 동사가 ‘아포스파오’(ἀποσπάω)입니다.
이 단어는 안녕을 빌면서 헤어지는 모습을 가리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떼어내다’(tear away)는 말입니다.
무엇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까?
에베소교회의 장로들, 에베소교회의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된 이들이 바울과 작별을 고하는데 도무지 헤어지지 않으려고 하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울과 그 일행이 그들을 따로 떼어내서 배를 타고 떠나왔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우리 지방회에 어른이지 않지만 어른처럼 존경을 보이는 목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지방회를 위해서도 헌신을 하고, 우리 감찰회를 위해서도 헌신하는 분입니다.
굵직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길을 잘터주고 또 자신이 물질로 잘 섬기는 분입니다.
그 분을 보면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저분이 지방회를 떠나 다른데로 간다면 다들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만큼 지방회를 위해서, 감찰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데, 그 사랑과 수고를 통해, 본문의 바울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죠.
(적용)이것은 우리 자신의 삶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주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전심으로 전력으로 헌신하고 섬긴 모습은 교회에서 드러나게 되는 법이죠.
마치 다비다가 연약한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어 나누고 섬겼는데,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 앞에 다들 통곡했던 것처럼 말이죠.
바울의 사랑과 섬김이 그랬고, 지방회 목사님의 사랑과 섬김이 그랬고, 다비다의 사랑과 섬김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 사랑과 헌신과 수고를 나눈 분들은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결코 잊을 수가 없는 법이죠.
(찬양)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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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바울 일행이 에베소교회 장로들 곧 에베소교회의 먼저되고 충성되고 헌신된 이들을 떼어내서 헤어진 후에 출발한 곳이 어딥니까?
첫 번째 당도한 곳이 고스입니다.
고스는 밀레도에서 남쪽으로 약 70km떨어진 섬입니다.
당시 고스는 ‘의학의 아버지’ 혹은 ‘의사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이기도 했죠.
바울 당시에도 고스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고, 좋은 의사로부터 육체의 질병을 고치기 원하는 병자들이 원근각처에서 고스를 찾았습니다.
그처럼 의학으로 명성을 떨친 고스에는 그리스 신화에 ‘의술의 신’으로 등장하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도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궁중화가 아펠레스가 그 신전에 그린 〈바다에서 올라오는 아프로디테〉는 고대세계의 걸작으로 꼽혔습니다.
2천 년 전 바울이 고스 섬에 도착했을 때도 그 신전에 그 걸작이 그대로 전시돼 있었습니다.
그만큼 고스는 예술의 도시이기도 했던 것이죠.
그러나 바울은 고스에 도착한 이후 낡이 밝자 곧장 동남쪽으로 80km 떨어진 로도 섬으로 갔습니다.
헬라어로 ‘로도스’로 블리는 섬이죠.
소아시아반도 연안에 자리 잡은 섬들 가운데 가장 큰 섬인 로도스는 ‘장미의 섬’으로 불린 섬입니다.
일조량이 풍부해서 가는 곳마다 화려한 장미꽃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기 때문이죠.
동서를 잇는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던 로도스에는 수사학과 웅변으로 유명한 대학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당시 로도스섬을 유명하게 한 것은 ‘헬리오스 콜로서스’(Helios Colossus)였습니다.
‘헬리오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을 말하고, ‘콜로서스’는 ‘거대한 조각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주전 305년 마게도니아의 공격을 막아 낸 로도스 시민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청동으로 ‘헬리오스 콜로서스’를 만들어 세웠던 것이죠.
그 높이가 무려 36m나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면서 아데미 신전과 함께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립니다.
물론 그 거대한 헬리오스 콜로서스도 지진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그 로도스에 도착했을때도 로도스의 명물인 무너진 헬리오스 콜로서스의 거대한 청동 잔해들을 보지 않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바울은 그롯 로도스의 명물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갈아탄 바울은 로도스에서 동쪽으로 약 85km 지점에 위치한 소아시아 반도 남쪽 항구 바다라로 갔습니다.
중요한 무역 항구도시였던 바다라는 지정학적 이점으로 인해 계절에 상관없이 수백 척의 상선들이 경유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리스 본토의 델피 신전에 필적할만한 아폴로의 신탁소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었죠.
(깨달음) 이처럼 바울은 밀레도에서 바다라까지 올 때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평생 지병에 시달리던 바울은 히포크라테스의 출생지이자 병자들의 이상향인 고스 섬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곳에 정착한다면 자신을 괴롭히던 지병을 다스리며 육체적으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도 있었겠죠.
뿐만 아니라 위대한 설교자였던 바울은 웅변과 수사학으로 유명한 ‘장미의 섬’ 로도스에서 웅변과 수사학을 가르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보다 안정된 노후를 보장받고자 한 유혹을 받을 수도 있었죠.
더욱이 계절에 상관없이 수백 척의 상선들이 드나드는 바다라에 정착해서는 자신의 천막제조 기술을 발휘해 돈을 벌어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육체적인 이점이나 경제적인 이점의 유혹들 앞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 곳도 그저 경유지로만 삼았을 분, 그 곳곳에 집착하거나 정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일에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본문)그리고 본문 2-3절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원해) 바울 일행은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바다라에서 지중해를 횡단하여 팔레스타인의 베니게로 직행하는 배를 탄 것입니다.
베니게는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인데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상 수리아에 속해 있던 곳이었죠.
그래서 바다라에서 베니게까지는 해로로 약 650km로, 당시의 선박으로 일주일 거리였습니다.
그 먼 거리를 직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상선이어야만 했습니다.
밀레도에서는 작은 연안선으로 고스와 로도스를 거쳐왔지만, 이제는 지중해를 횡단하여 베니게로 직행하고자 큰 상선을 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큰 상선을 타고 가는데 바울과 그 일행은 ‘구브로를 바라봤다’하는 점입니다.
우리말 ‘바라보다’는 헬라어 동사 ‘아나프하이노’(ἀναφαίνω)는 본래 ‘나타나다’(appear)는 뜻입니다.
배를 타고 가다 보면 섬들이 나타났다가 옆으로 스치는 모습들이 그것이죠.
지금 베니게를 향해 지중해를 헤치고 나아가는 바울이 탄 배 앞에 구브로 섬이 나타나 스쳐지나가는 모습입니다.
그 구브로 섬이 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나 뻗어 있는 섬이기 때문에 바울은 하루 가까이 구브로를 바라봤던 것이겠죠.
(깨달음)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왜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겠습니까?
바울이 지중해를 지나가는데, 하루 내내 구브로를 바라보면서 지나갔다는, 이 말씀을 왜 강조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죠.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처음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한 곳이 바로 그곳 구브로 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정말로 낯선 전도여행길이었고, 뭐든지 어설프기 짝이 없는 길목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13년이 지나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가 곧이어 환란과 결박을 당해 로마까지 가야 할 상황속에서 구브로 섬을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왜죠?
“바울이 네가 가는 길에 환란과 결박이 기다릴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처음 복음전도의 발길을 떼던 13년 전에도 내가 나의 손으로, 곧 여호와의 손으로 너를 지켜주지 않았더냐?”
“그러니 앞으로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에 결박을 당해 끌려갈지라도 여호와의 손이 너와 항상 함께 하지 않겠느냐?”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일깨워주고자 13년 전에 들러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그곳 구브로 섬을 하루내내 비춰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때 여러 난관이 다가와도 여호와의 손길로 도와주셨던 그 은혜를 떠올리며 통과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다윗이 양을 칠때도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여호와의 손으로 지켜주지 않았더냐?”
“다윗이 골리앗을 맞설때도,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자로 살때도 항상 여호와의 손길로 그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지 않았더냐?”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지중해 바다에서 구브로 섬을 보도록 주님께서 이끄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환란과 결박을 당해 로마로 압송될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으로 바울을 붙들고 계심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받들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사명을 완수할 때 때로 유혹과 어려움들이 밀려들때가 왜 없겠느냐?”
“하지만 그때마다 13년 전에 복음을 사명을 받아 떠나는 바울을 하나님의 손길로 붙들여주셨던 것처럼 너도 그렇게 붙들어주지 않았더냐?”
“하나님은 네가 변하지 않는한 절대로 변하지 않는 분이니, 어떤 유혹과 낙심이 밀려와도 여호와의 손길로 너를 붙들어주고 계심을 늘 기억하도록 해라.”
(찬양)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쓰러질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두운밤 어둠이 깊어 날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 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차츰 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0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난관들이 밀려오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뚫고 나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마다 여호와의 손길, 그 하나님의 손길이 인도하시고 도와주신 까닭입니다.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난 이후 13년만에 구브로섬을 다시금 바라봤을 때, 주님의 그 은혜를 떠올리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인생의 여러 어려움과 난관들이 봉착할 때 그마다 여호와의 손길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 은혜를 구하면서 이 시간에 주님 앞에 간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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