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행20:25-27)

by 똑똑이채널 2022. 4. 6.
728x90
반응형
SMALL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hwp
0.19MB

(설교열기)(논지) 얼굴이란 말은 얼꼴에서 온 말입니다.

얼이 꼴에 드러난다는 뜻이죠.

그 사람의 영, 그 사람의 혼, 그 사람의 정신이 그의 얼굴 표면에 나타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어떤 영과 정신과 혼과 뜻을 갖고 사는가는 정말로 중요한 일이죠.

 

(예화)1984년의 기네스북에 가장 이혼을 많이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은 스카트 월프라는 사람입니다.

과연 그가 몇 번의 이혼을 했고 몇 번의 결혼을 했을까요?

그는 26번째이나 이혼을 했고, 죽기 전까지도 27번째 부인을 찾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기 직전에 어떤 친구가 그에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당신의 생애 속에 후회한 적은 없는가?”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다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나는 한 부인과 살고 싶다. 나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정이 없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까?

제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얼굴을 봤는데, 생기긴 잘 생겼습니다.

 

그러나 외모가 행복한 가정생활을 가져오는 것은 결코 아니죠.

그의 얼굴에 무슨 얼을 담고 사느냐에 따라 가정의 행복이 결정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면, 그가 하나님의 신실한 뜻을 담고 사는 자였다면 결코 26번이나 이혼하지는 않았겠죠.

 

(적용)얼마 전에 페이스북을 보니까,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님의 아들이 목회하는 교회의 집사님이란 분이 쓴 글을 봤어요.

그분의 사연은 그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김장환 목사님의 둘째 아들인가 되는데, 대전에서 목회하는데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죠.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 집사님이 보기에 김장환 목사님이 결코 올바른 영이 아니라 그릇된 영에 사로잡힌 얼굴을 하고 다닌 것 같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김장환 목사님이 70이 넘어 은퇴할 때 자기 사위에게 교회담임목사직을 물려줬죠.

더욱이 극동방송 이사장도 진작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는데, 아직까지도 그 탐욕을 내려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신천지와 결탁하고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알려진 윤석열 당선인을 불러서 비공개적으로 축하예배를 드렸다는 거죠.

그런 모습들을 보면, 그 둘째 아들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할까, 싶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고 얼마나 공감이 됐는지 모릅니다.

목회자도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엘리 제사장처럼 분별력을 상실하면 얼마나 추해지는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회자 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들의 얼굴도 마찬가지죠.

마지막 내가 주님 앞에 서야 할 때, 늘 그때 주님께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늘 신실한 얼굴을 하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고린도에서 베뢰아로 데살로니가로 빌립보로 옮겨오면 예루살렘교회 구제헌금을 모았죠.

이제 빌립보의 외항 네압볼리에서 배를 타고 드로아 항구로 건너왔습니다.

그곳 드로아에서 밤늦도록 복음을 전하다가 노예인 유두고가 다락에서 떨어져 죽었다가 주님의 은혜로 살아난 일이 있었죠.

그때 주님께서 그 청년을 살려주실 때 바울을 도구로 사용하셨는데, 그때 바울은 더더욱 주님의 생명으로 쓰임받고자 했겠죠.

 

그 드로아에서 바울은 일행과 배를 타고 앗소로 가야 하는데, 바울 홀로 육로로 걸어서 이틀만에 앗소에 당도했죠.

목포에서 화순까지의 걸리인 65km를 홀로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까?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이 무엇인지, 홀로 단독자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그 길을 걸어갔죠.

그때가지도 바울은 자신이 모은 구제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고 자기 목회지인 안디옥교회에서 여생을 보내면 될 것으로 생각했죠.

하지만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가는 그 길목에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묵상하고 기도할 때 주님은 안디옥의 여생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가서 환란과 결박을 당할 것이고, 그곳에서 체포돼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죽을 것이란 사명을 깨닫게 되죠.

 

그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앗소에 도착해서 그 일행을 만나 곧장 미둘레네로, 기오로, 사모로, 또 밀레도에 당도했죠.

밀레도에 당도했을 때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 곧 에베소교회에 먼저된 자들을 불러 당부의 말씀 곧 고별설교를 전했죠.

마치 모세가 요단강 강둑에서 출애굽 1.5세대와 2세대를 바라보면서 고별설교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무엇을 강조해서 설교했습니까?

여러분. 제가 어떻게 3년 동안 에베소에서 복음의 씨를 뿌렸는지 여러분이 증인 아닙니까?”

제가 에베소에 온 첫날부터 마지막 떠난 날까지 겸손과 눈물을 주님을 섬겼고, 성도들을 섬기지 않았습니까?”

그 모든 초점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회개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 함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가게 되는데, 여태까지 오는 길에 여러 사라이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데는 내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깨달음)바로 그와 같은 고별설교 내용을 지난 시간에 살펴봤었죠.

바울은 자기 생명이 자기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자기 생명의 주관자가 되어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의 대적자로 살았죠.

그런 죄인 중의 괴수인 그를 주님께서 만나주시고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증인으로 삼아주신 것을 알고 있으니, 자기 생명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용)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내 생명의 주관자 같고, 내가 내 모든 소유물의 주인이 것 같지만, 우리의 모든 생명과 소유는 주님의 것이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우리는 이 세상의 주관자인 마귀의 소유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죠.

 

그러니 우리도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내가 내 생명의 주관자도 아니고 내 소유의 주인도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사는 자들이죠.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허락하신 내 생명과 내 소유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하나님께서 하란 땅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낯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순종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죠.

미디안 광야에서 나이 80이 된 모세가 애굽의 파라오에게 맞서 내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라고 할 때 순종한 것도 그렇죠.

예레미야도 유다 왕국의 왕과 고관대작과 백성과 제사장들마저 부패하여 바벨론에게 멸망할 거라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할 때 순종한 것도 마찬가지였죠.

 

그 길이 낯설고 피하고 싶고 때로는 죽음의 사지로 가는 길이지만 그들이 순종한 것은 자기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내어드릴 수 있는 믿음의 청지기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인데, 바울은 계속해서 고별설교를 이어가고 있죠. 25절입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을 아노라.”

 

(원어)우리말 얼굴을 가리키는 헬라어 프로소폰’(πρσωπον)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방향을 가리키는 전치사 프로스’(πρς)을 뜻하는 옵스’(ὤψ)의 합성어입니다.

얼굴의 중심은 눈에 있습니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내 얼굴을 돌리는 것은 실은 내 눈길을 돌리는 것에 따라 결정되죠.

내 눈은 항상 내 관심이 머무는 곳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눈의 움직임이 얼굴의 움직임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 눈은 마음의 창이지 않습니까?

내 마음의 표현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때 내 눈빛으로 표현을 합니다.

내 눈빛을 통해 상대방은 내 마음을 읽기도 하죠.

 

(깨달음) 그렇기에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먼저된 이들에게 고별설교하면서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한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3년간 에베소교회를 서기면서 어떤 눈을 갖고 어떤 마음을 두며 어떤 것을 바라보며 살아왔는지 여러분이 내 얼굴을 봐서 안다는 겁니다.

그런 내 얼굴을 여러분들이 다시는 보지 못할 터이니, 이제는 여러분들이 내 눈길, 내 얼굴, 내 마음처럼, 오직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 바울의 눈길, 바울의 얼굴을 바라보는 에베소교회 먼저된 이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정말로 바울 사도가 그런 눈길과 그런 마음을 쏟아부은 걸 알고 있으니, 자신들도 그런 마음과 다짐으로 하나님나라를 섬기는 얼굴로 살아야 되겠다는 결단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적용)그런 바울의 얼굴에는 26번이나 이혼하고 27번째 부인을 맞이하려는 스카트 월프라는 사람의 얼굴일 수는 없겠죠.

그런 바울의 얼굴에는 노욕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비친 김장환 목사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얼굴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다른 누구를 빗대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자신이 드러내고 있는 내 얼굴은 어떤지 돌이켜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고별설교하는 바울의 얼굴처럼 신실하고 진실된 얼굴로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그렇기에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의 음성으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어떤 얼굴로 평상시에 살아가고 있느냐?”

바울처럼 어떤 환경과 상황속에서도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마음과 시선을 지닌 얼굴로 살고 있느냐?”

네 마음과 네 시선이 내 얼이 되고, 그 얼이 네 꼴에 드러날터닌데, 너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마음과 시선을 지녔으면 좋겠구나.”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 세상에 26번이나 이혼하고 새로운 결혼을 한다고 해서 그 삶이 행복하겠느냐?”

나이가 들어서도 노욕을 감추지 못한 그 목사의 마음과 눈길과 얼굴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겠느냐?”

보다 젊은 시절에 겸손하고 진실되게 하나님나라를 바라봤던 그 눈길과 마음을 늙어서까지 유지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더욱 너 자신을 쳐서 주님께 복종해야만 늘 성령님과 함께 하는 얼꼴을 지니며 살 수 있지 않겠느냐?”

 

(찬양) 여호와 나의 목자 내게 부족 없네 푸르른 초장 위에 나의 몸 누이시네

선한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하시네

내 영혼 소생하며 자기 이름 위해 의의 길 인도하니 골짜기 두렴 없네

선한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하시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0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북팟

www.bookpod.co.kr

(본문2)그런데 바울은 본문 26-27절을 통해 모든 사람의 피해 대해 깨끗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근성)바울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에스겔서의 말씀을 바울이 자신에게 적용해서 말한 것입니다.

에스겔서 337-9절 말씀이 이렇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

 

(깨달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라를 영적인 파수꾼으로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시키는 사명을 부여했다는 말씀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군과 치르는 전쟁을 보면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굽니까? 파수꾼이죠.

왜냐하면 파수꾼은 적들이 침입해 왔는지, 적의 동태를 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고, 또 어디까지 근접했는지 살폈죠.

그래야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적들을 맞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더 큰 성읍으로 후퇴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만약 파수꾼이 그날 잠들어 있어서 고보하지 못했다면 그 파수꾼은 책임을 면치 못하고 완전히 죽게 되죠.

그러나 그 파수꾼이 책임을 다하여 그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보고했는데도, 성안에 사람들이 준비하지 못했다면 그 죽음의 피에 대해서 파수꾼은 책임은 없는 것이죠.

 

지금 바울이 바로 에스겔서의 말씀을 빗대서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영적인 파수꾼 역할을 다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제부터는 그 피에 대해 자유하다는 것만 강조한 아니라 에베소교회의 먼저된 자들, 지금 바울의 고별설교를 드고 있는 이들에게 영적인 파수꾼으로 깨어있기를 바란 것이죠.

 

바로 그것이 남은 인생을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눈을 갖고 사는 것이고, 그것이 신실한 영적인 얼굴을 하며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화)그런 얼굴은 스데반 집사의 얼굴에서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성전보다 더욱 크신 하나님,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리의 성령에 대해 설교했죠.

그때 성전을 우상시하던 공회원들이 스데반 집사를 향해서 돌로쳐 죽여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증언합니까?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7:55)고 증언하죠.

 

(깨달음) 스데반 집사의 얼굴에 성령이 충만한 것은 한 때 그런 게 아니라 늘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그 뜻을 두고 그 마음과 눈길을 쏟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그 속에 담긴 마음의 창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과 그런 눈길을 두고 두며 사는 얼굴이 되길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예화)어느 교회의 한 청년이 목사님에게 전도지 한 장을 들고 왔다고 합니다.

목사님. 이거 재미있지요?”하면서 말이죠.

그 청년이 들고 온 전도지를 보여주는데 이런 글씨가 씌여 있었다고 합니다.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런 글씨를 보니까 그 목사님도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라고 할까?’하는데, 그 청년이 그것을 뒤집어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그 전도지를 뒤집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이런 글씨가 씌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것 같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그렇죠.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가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런 영적인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의 C. S. 루이스 교수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 최대의 문제는 구도의 정신을 상실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런 영적 위기를 알지도 못하며 거기서 빠져나가기 위해 진지하게 진리를 찾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이 시대에 구도의 정신을 상실하고 말았다.”

 

어떻습니까? 그분의 말이 맞지 않습니까?

오늘날의 신앙인들 가운데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있는 것은 믿지만 천국을 자랑하고 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체험이 없고 구원의 감격도 모르고,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에스겔 선지자처럼,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한 파수꾼처럼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에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얼굴이 드러나겠느냐는 것이죠.

 

(내음성)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죄와 사망의 자녀였고, 마귀의 자녀였던 저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해 주신 은혜 감사드려요.”

제 마음과 눈길이 하나님나라를 향하게 하시고,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보고 영적인 파수꾼으로 살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스데반처럼 설령 돌에 맞아 죽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우편에 서서 맞아주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해 주세요.”

제 얼굴에 성령이 충만한 얼굴이 되게 해 주시고, 제 얼굴에 복음의 얼굴이 드러날 수 있도록 역사해주세요.”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여 하나님나라 천국에서 칭찬받는 파수꾼이 되게 해 주세요.”

 

(찬양)주님의 지팡이가 안위하네 나를 주께서 원수 앞에 상으로 베푸시네

선한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하시네

기름을 머리위에 바르시는 주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함 따르리니

선한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하시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1 

 

야긴과 보아스

북팟

www.bookpod.co.kr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얼굴도 바울의 얼굴, 스데반의 얼굴, 모세의 얼굴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얼굴이 26번이나 결혼할 그런 얼굴은 못된다할지라도 우리의 얼굴속에 담긴 얼,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얼굴을 가장 복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눈이 하나님나라에 두고 사는 얼굴인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지옥을 향해 치닫는 이들을 위해 영적인 파수꾼으로 사는 은혜를 주님께서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바울처럼, 스데반 집사처럼 이 땅을 떠나는 날 주님께서 백보좌 우편에서 우리 각자를 맞아주시는 기쁨의 얼굴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