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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모세는 하나님께서 베푼 은혜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 40년을 헤쳐왔죠.
그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광야에 당도했을 때 언약식을 체결했고, 언약의 증표로 십계명을 주셨죠.
그리고 성막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때로 그들이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할 때 광야의 반석을 쳐서 생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먹을 양식과 고기가 없다고 원망할 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주셨죠.
그리고 뜨거운 사막길을 걸을 때는 구름기둥을 보내서 그들을 시원케 해 주셨습니다.
밤에 차가운 공기가 엄습해 올 때는 불기둥을 보내서 그들을 따뜻하게 보호해 주셨죠.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먼저 가시는 하나님’ 곧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그 백성이 광야 40년을 통과했을 때, 모세는 그 백성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죠.
하나님께서 반석을 치라했을 때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어야 했는데 누나의 죽음 앞에 그렇지 못했죠.
그와 같은 불순종으로 인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데 된다면 모세를 신격화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제 모세가 백성들과 작별해야 할 때가 온 것을 직감했을 때 그 백성들에게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새기고 지키면서 살 것을 당부했죠.
그게 바로 모세가 요단강 강둑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설교한 고별설교요 그것이 신명기 말씀이죠.
그때 모세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 강조했습니까?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신31:9-11)
(깨달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한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지킬 것을 강조했죠.
왜 하필 백성의 장로들이었겠습니까?
그들은 이스라엘 가정의 대표자들이고 각 족속을 대표하는 리더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정이든, 어떤 조직이든, 어떤 교회든, 먼저 된 자들이 본을 보이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죠.
(적용)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가정을 대표하는 부모가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면 자식들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대표자들 곧 먼저된 이들이 나중된 이들 앞에 본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만큼 먼저된 이들이 말씀을 가까이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면 나중된 이들도 닮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드로아에서 65km의 앗소까지 홀로 걸어서 왔습니다.
다른 동역자들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앗소까지 와서, 바울을 기다려야 하는 셈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이틀에 걸려 홀로 걸어왔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단독자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심정으로 자신이 가야 할 사명을 놓고 기도하며 걷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떨어져 홀로 기도하며 그 십자가 잔을 놓고 기도하듯이 말이죠.
그렇게 해서 바울이 앗소에서 기다리는 일행과 만났을 때 곧장 그곳에서 배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앗소에서 미둘레네로, 미둘레네에서 이튿날 기오로, 기오에서 또 이튿날 사모로 당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모는 에베소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섬입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를 떠난지 1년이 지난 시점에 에베소에서 가장 가까운 섬에 당도한 것이죠.
그렇다면 에베소로 가서 3년간 정들었던 성도들을 한 분 한 분 만나고 격려하는 게 도리라 생각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바울은 사모섬에서 에베소로 향하지 않고 곧장 뱃머리를 돌려 밀레도에 당도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16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당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기근에 굶주리고 있는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하루라도 빨리 전달코자 함이었습니다.
물론 더 중대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오순절은 성령강림절을 뜻하기에 성령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선교사역에 역사하셨는지 증언코자 함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교회 성도와 다른 지역에 온 성도들에게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전하고자 함이었죠.
(깨달음)그것은 오늘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죠.
목포에 하루 확진자가 1천명-2천명이라면 벌써 10%를 넘어 20%에 육박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미 코로나19가 스쳐지나갔는지 모를 것 같습니다.
이런 와중에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속에서도 나를 위로하시고 내게 힘을 주시는 성령님과 동행할때만 가능한 일이죠.
우리 나혜정 성도님도 갑상선 종양은 제거하면 되고, 유방암은 초기라 치료를 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해주셔서 감사한데, 그만큼 우리 자신은 우리의 건강을 자신하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들 아닙니까?
그러니 매 순간 성령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은혜 속에서 이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인데, 본문 17-21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원해)바울이 일행과 함께 밀레도에 당도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45km에 위치한 곳인데, 2천년 당시 에베소 다음으로 큰 도시입니다.밀레도 출신의 물리학자 이시도루스가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을 설계한 인물로 알려져 있죠.
막대기 하나로 거대한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한 수학의 기초를 닦은 텔레스의 고향이 밀레도죠.
밀레도는 그 정도로 상업과 철학과 예술의 도시인데, 바울은 그곳에서도 한 눈 팔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밀레도에 여장을 풀고 며칠을 묶었을 것이고, 에베소에도 가서 성도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눠겠죠.
하지만 바울은 지금 밀레도나 에베소가 목적지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목적지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해서 당부의 말을 전하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요단강 강둑에서 광야 40년을 헤쳐온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모아 고별설교한 것과 같죠.
이때 바울이 강조한 바가 무엇입니까?
18절에 보면 첫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행했는지를 여러분들이 다 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겸손함으로 복음을 전하고, 또 눈물을 흘리면서 유대인의 시험을 이겨낸 모습을 말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에게 오직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촉구한 것을 여러분들이 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살았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믿음의 증언이었다는 것이죠.
(깨달음)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에베소에서 복음을 위한 믿음의 증인으로 산 것처럼 그 장로들도 그 본을 보여달라는 당부죠.
그런데 그런 당부를 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하는 것입니까?
이때의 장로란 오늘날과 같은 직분을 맡은 장로를 말하는 게 아니죠.
에베소 교회를 먼저 섬긴 먼저된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먼저된 자들로서 나중된 이들 앞에 참된 믿음의 증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된 이들이 여러분이 보인 믿음의 본과 복음의 증인으로 산 것을 닮지 않겠느냐는 거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저와 여러분들도 먼저된 자들로서 나중된 이들 앞에 믿음의 본을 보이며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성령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별을 앞둔 모세가 요단강 강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당부했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믿음의 땅에서 오직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도록 당부하지 않았더냐?”
“바울도 지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에 밀레도에 들러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해 무엇을 당부한지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바울이 에베소서 3년간 겸손과 눈물로 유대인과 헬라인들을 향해 복음의 증인으로 믿음의 증인으로 산 것처럼 그렇게 살기를 당부한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출애굽한 믿음의 1세대처럼 자식들 앞에 믿음의 본을 보이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도 에베소교회의 장로들 곧 에베소교회의 먼저된 신앙의 선배처럼 나중된 이들 앞에 믿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믿음의 본을 보이는 일이란 때론 바울처럼 눈물나는 일도 있고 유대인의 간계처럼 어려운 일도 당하는 일이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그를 통해 주님의 교회를 세우도록 당부하지 않았더냐?”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예화)서양 정신사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서로 상이한 태도를 나타내는 유명한 경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이고 다른 하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입니다.
이 두 단어를 주제로 한 소설과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메멘토 모리’란 뜻은 ‘죽음을 기억 하라’는 말입니다.
‘카르페 디엠’은 ‘오늘을 붙잡아라’, 다시 말해 ‘현재를 즐기라’ 하는 말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두 마디 말이 로마의 두 황제에 의해 유래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황제는 신하에게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시오!’라고 인사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사하도록 한 황제는 아마도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아니었을까 추정을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황제는 신하들에게 절대로 자기 앞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사용치 못하게 했다고 하죠.
그 황제는 ‘메멘토 모리’라는 말 대신 ‘오늘을 즐겨라’는 ‘카르페 디엠’이란 말을 사용토록 했다는 거죠.
그 명령을 한 황제가 바로 네로 황제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깨달음) 크리스천인 우리는 어떤 경구를 새기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을 즐겨라’는 카르페 디엠보다 ‘죽음을 기억하며 살라’는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죠.
바울도 어쩌면 그런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근성)왜냐하면 24절 말씀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으로 가는 길은 살기 위함이 아니라 죽기 위함 곧 죽음을 기억하며 나아가는 것이죠.
(적용)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어떤 환란과 결박과 핍박이 다가올지라도 우리 각자의 죽음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그것이 천국에서 가장 귀한 상급을 받는 길이기 때문이죠.
(예화)에베소교회에서 가까운 서머나 교회에 그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서머나 교회에 ‘치아파닉’이라는 12살 먹은 남자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황제숭배 사상으로 인해 황제를 신성시하여 황제상을 만들고 제단에 절하게 하던 때였죠.
그런데 그 아이는 절하지 않고 서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아이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내 생애에 가장 귀한 분이고 오늘까지 나를 살리신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절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하고 말입니다.
그로 인해 그 아이는 당시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처럼 사자 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은 그 교회 지도자인 폴리갑을 잡아오도록 당국에서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총독이 보니 그 폴리갑 감독은 지역주민이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분을 자기가 앞장서서 죽이는 걸 좋아할 리가 없었죠.
그래서 마지막 기회를 준다고 하면서 이렇게 폴리캅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보시오. 폴리캅 주교. 가이사 황제가 주인입니다, 라고 한 마디만 하면 죽음을 면할 것이오.”
그때 폴리갑 감독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지난 86년 동안 주님은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주님을 저는 절대로 배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A.D.155년 2월 23일 토요일에 화형을 당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폴리캅이 남긴 믿음의 삶을 통해 서머나교회 성도들이 그 본을 본받아 믿음의 삶을 살았단 것 아니겠습니까?
(내음성)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요. 주님. 저도 저의 남은 날을 계수하며 지혜로운 인생을 살게 해 주세요.”
“오늘을 즐기라는 까르페 디엠보다는 메멘토 모리 곧 ‘나의 죽음을 기억하며 사는 인생’이 되게 해 주세요.”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이지만 바울이 그 길을 향해 묵묵히 나아갔던 것은 어떤 죽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최후를 맞이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폴리캅 감독이 86년 동안, 화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그 날까지 믿음을 지킨 것처럼 저도 그 길을 따라가게 해 주세요.”
“이 땅의 상급이 아닌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나라의 교회를 세우는 증인으로 살게 해 주세요.”
“그런 삶이 이 땅에 남은 자들에게 가장 선한 고별설교가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영광의 길 너 걷기 전에 갈보리길 너 걸으라
내 모든 것 주께 맡긴 후 하늘 문을 바라보라
하늘 가는 다른 길 없네 오직 예수 오직 한 길
갈보리 길 걸어가신 주 그 길 따라 너 걸으라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길이 있네
죄에 빠진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 피 흘렸네
못박힌 손 날개 펼치사 나로 그늘에 쉬게 하며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 날 오라 부르시네
하늘가는 다른 길 없네 다만 한 분 나의 예수
부활의 주 말씀 하시네 갈보리 길 너 걸으라
고난의 길 앞서가신 주 가시관에 머리 찔렸네
그 십자가 날마다 보네 내 모든 죄 다 씻겼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목적하는 본래 목적지는 수리아 안디옥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끄시는 과정에서 그 목적지는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길이 죽음을 향하는 길목임을 바울은 알고 있었지만 피하지 않고 그 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십자가를 맞이하는 그 길이 골고다 언덕길이지만 주님은 피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명을 받들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을 때 어떤 환란과 어려움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을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보다 메멘토 모리처럼 우리 각자의 죽음을 내다보며 사는 자가 지혜로운 자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를 친히 구원해 주셨으니 말입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영원한 승리의 부활로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셨죠.
그 주님의 모습을 지금 바울이 가고자 한 길이고, 그 죽음 너머에 부활과 상급이 있음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나라의 교회를 세우는 십자가 길을 걸어갈 때 그 너머에 승리의 부활과 영광의 상급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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