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전개)사순절 첫 번째 주간을 맞이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 고난을 받아야만 했습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대속해 주시기 위함이셨죠.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구원받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소멸돼도 결코 소멸되지 않는 참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걸 말합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참생명 곧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걸 말합니다.
마치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이후, 다시는 그 홍해를 되건너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격이죠.
홍해 이전의 애굽의 삶은 죄와 사망의 삶이라면, 홍해를 건넌 그 이후의 삶은 가나안 땅을 향한 새 생명의 순례의 길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의 참 생명 곧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영적인 가나안 땅 곧 천국에 입성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까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걸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이 땅에서 사랑을 말하지만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는 말씀이죠.
또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영생의 나라에 들어갈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며 실천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죠.
그만큼 거듭난 자 곧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예)제가 전주에서 자취할 때도 이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 한 집은 장로님 댁에서 세준 월세집이었죠.
그곳에서 한 2년간 살아갔는데, 이제 재계약을 해야 할 때가 되었죠.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장로님의 권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사님. 이 집에서 더 살아요. 월세를 올리지 않을께요.”
그때 제가 뭐라고 그랬을까요?
“권사님. 감사드립니다. 제 형편을 살펴서 그렇게 해 주시니, 제가 몸들바를 모르겠습니다.”
(나예)서울에서 개척할 때 상가 2층을 1억 전세로 해서 예배당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2년이 될 때 상가 주인이 10만원을 더 올렸습니다.
물론 그 분은 주님을 믿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10만원을 더 올려주고 예배당을 사용했죠.
그리고 또 2년이 지났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때는 또 올려달라는 게 아니라 아예 그 예배당을 빼달라고 하는 것이었죠.
처음 예배당을 꾸밀 때 들어간 비용이 천만원 가까이 들어갔는데, 너무나도 속상했죠.
그런데 왜 예배당을 빼 달라고 하는가 알아봤더니, 1층에 새로 들어온 마트가 2층까지 사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쩔 수 없이 다른 상가 2층으로 이사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경매를 알아보고 서울 남부지방법원을 찾아가 경매를 어떻게 받는지, 경락대출은 어떻게 받는지 알아봤었죠.
(타예)집이든 상가든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2년마다 재계약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마다 재계약을 하는 세입자들은 정말로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위스에서 살다가 온 어떤 목사님이 어느 분과 공개적인 토론을 하면서 스위스의 세입자들의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한 번 세입자가 이사해서 들어오면 나갈 때까지 집세를 올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스위스에서는 세입자가 한 집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자녀들을 결혼시키는 일들도 다반사라고 하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세입자들이 힘들게 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이었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그 교회의 어느 나이든 부부가 갈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사 때문이 아니라 집을 세 준 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집에 세입자가 살고 있는데 이제 2년 되어 재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니까 마음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1-2년 사이에 1-2천만원을 올리는 형국이었으니 말이죠.
그런데 새벽기도회에 나가 기도를 하는데, 그 노부부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신 것이었습니다.
세입자로 사는 젊은 부부에게 월세를 올리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감동 말예요.
물론 그 세입자 부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부부였습니다.
그래서 그 세입자 부부가 그 집 주인되는 그 노부부에게 물어봤다고 하죠.
“아니, 왜 저희의 월세를 올리지 않는 것입니까?”
“교회에서 하라고 해서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깨달음)어떻습니까?
모두가 월세를 올려서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싶은 마당이지만 자발적인 검소함을 갖고 사는 그 부부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생명이 깃들어 있는 부부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노부부가 많으면 많을수록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분들이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적용)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참 생명을 얻은 자로 사는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배) 바울이 고린도에서 3개월을 머물고 배를 타고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알게 되었고, 곧장 걸어서 600km가 넘는 빌립보로 오게 되었죠.
고린도에서 빌립보로 오는 길목에 아테네를 거쳐 베뢰아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빌립보교회에 들렀죠.
이유인 즉 예루살렘교회가 당한 기근을 위해 선교비를 모으고자 함이었고, 그래서 600km를 걷는 동안 그 교회에 들러 중직을 맡은 자와 함께 빌립보로 향했죠.
말이 600km지, 목포서 서울까지 300km를 왕복하는 코스였으니, 50대 후반의 나이인 바울로서 얼마나 힘든 길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그 길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일지라도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임을 믿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빌립보교회에 당도했을 때 의사 출신의 누가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바울의 주치의로 지근거리서 보필했죠.
(깨달음)그 모두가 주님을 위해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때 때로 주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만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곳 빌립보의 외항 네압볼리에서 배를 타고 드로아 항구로 건너가는 상황이었습니다.
함께 한 동료들은 먼저 드로아로 건너가서 바울의 일행 곧 바울과 누가를 기다리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바울과 누가가 배를 탔을 때 그 배가 5일이나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네압볼리까지 2일이면 충분했는데, 왜 하필 지금은 3일이 더 걸린 것입니까?
그 바다에 풍랑이 밀려와 배가 떠밀려 다녔기 때문이죠.
2천년 전에는 지금과 같은 동력선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 노를 젓거나 닻을 올려서 다녔죠.
그렇게 5일이 걸려 드로아에 당도했을 때, 바울 일행은 7일을 그곳 드로아에서 머물렀음을 지난 시간에 살펴봤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3일동안 바다에서 떠다니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드로아에서 쉼을 얻고 충전을 해서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함이었죠.
(본문)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직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7-9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원해)여기에서 ‘그 주간의 첫날’이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안식 후 첫날’ 곧 주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부터 주일예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 때 ‘떡을 떼려 모였다’는 것은 당시의 주일예배 때 성찬과 애찬을 겸한 예배로 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함께 모인 그 장소가 ‘윗다락’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등불을 많이 켰다고 밝혀줍니다.
어두워서 그렇게 불을 밝혔겠죠.
그런데 바울의 강론이 밤중까지 계속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밤중’이란 자정 12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바울의 강론시간이 길어진 것이겠습니까?
바울이 드로아의 제자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모두가 뜨거운 마음으로 받고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대답하다 보니 길어긴 것이었죠.
그런데 그곳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그곳 다락방에 모인 무리와 바울이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문쪽에 걸턴 앉아 있다고 졸다가 떨어져 죽은 사건이 발생했죠.
당시에 ‘유두고’란 이름은 노예 출신의 이름입니다.
그만큼 유두고라는 청년은 주일날 낮에까지 힘들게 일하다가 밤늦게 복음을 듣는 중에, 그만 떨어져 죽고만 것입니다.
여기에서 ‘죽었는지라’하는 말씀이 헬라어로 ‘네크로스’(νεκρός)로서 ‘시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를 두고 죽은 게 아니라 생명이 붙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9절을 기록한 사람은 의사 출신의 누가였다는 점입니다.
누가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처럼 세리 출신도 아니고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처럼 어부 출신도 아니라 의사출신입니다.
그만큼 유두고의 심장이 멎어 시체가 되었기 때문에 ‘네크로스’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본문2)그런데 본문 10-12절은 그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원해)유두고란 청년이 창문에 걸터있다가 떨어져 죽었을 때 바울은 즉시 내려가 그의 시체 위에 엎드려 그 시신을 안았죠.
이것은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릴때도(왕상17:21-22)도 그런 방법으로 살려냈었죠.
또한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도(왕하4:35-36) 동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능력으로 붙들어 살려내고자 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유두고의 생명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유두고의 생명을 살려냈을 때, 모두가 함께 떡을 먹고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살아난 청년 유두고를 통해 모두가 적지 않는 위로를 받았다고 증언해주고 있죠.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이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헬라어로 ‘프쉬케’(ψυχή)입니다.
그 뜻은 단지 유두고의 육체의 생명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생명을 부어 새롭게 살려주신 생명 곧 참생명,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이후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이후의 참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계약할 시점에 세입자에게 월세를 올리지 않고 동결함으로서 세입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는 노부부의 참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참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이죠.
(주문)그렇다면 오늘 유두고에게 참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참생명 영원한 생명안에 살기를 바라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 살때는 육신의 생명만 붙어 있는 존재였지 않느냐?”
“그들이 홍해를 건넌 이후에 가나안 땅을 향하는 생명은 주님 안에서 거듭난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의 삶이지 않더냐?”
“사순절을 맞이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사는데,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느냐?”
“너희 허물과 죄를 대속해 주시고 너에게 참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것 아니냐?”
“그렇다면 너의 생명이 이전과 동일한 육신의 생명인지 아니면 주님 안에서 참생명 영원한생명을 살고 있는지 돌이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했는데, 그런 삶이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이지 않겠느냐?”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것이 참생명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사는 자이지 않겠느냐?”
“너도 세입자의 고충을 겪어봐서 알 듯이 나중에 너의 집에 세든 세입자가 있다면 부담없이 살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그것이 참생명 영원한 생명의 삶이지 않겠느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그 말씀이 바로 이 땅에서부터 참생명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지 않겠느냐?”
“너의 삶이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참생명이 되도록, 주님의 영원한 생명이 되도록 살아가는 삶이 천국의 삶이지 않겠느냐?”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 이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감싸주지 않겠느냐?”
(찬양)나의 모습 나의 소유 주님 앞에 모두 드립니다
모든 아픔 모든 기쁨 내 모든 눈물 받아주소서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기쁨의 제물 되리 나를 받아주소서
어제 일과 내일 일도 꿈과 희망 모두 드립니다
모든 소망 모든 계획 내 손과 발을 받아주소서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기쁨의 제물 되리 나를 받아주소서
(예화)통계에 따르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대아파트 관리직원들과 경비근로자들이 입주민들로부터 당한 폭언폭행이 850건에 달한다고 합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 임대아파트에서만 그 정도라면 전국의 아파트에서 발생하는 입주민들의 폭언과 폭행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입주민들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아파트 경비 근로자들도 있었죠.
그런데 어느 60대 후반의 크리스천이 아파트 경비 근로자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그 삶이 달라졌습니다.
그분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사 간 이후부터 경비원의 식사를 매일 챙겨 주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을 접대하다가도 식사 시간이 되면 반드시 그 경비원의 밥을 챙겨서 가져다준다고 하죠.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새생명, 예수님의 참생명,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천국을 사는 영원한 생명의 삶이지 않겠습니까?
(예화2)성자(聖者)처럼 존경받는 나이 많은 한 수도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다가왔죠.
경험 많은 수도사는 후배 수도사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자네, 이 단단한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도사가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그 물은 옆으로 다 흘러나가고 말았습니다.
“물이 이 흙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는구먼. 그렇지?”
그러더니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고 단단한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한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물은 잘 스며 들었고 부서진 흙을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여 준 나이든 수도사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그 씨는 반드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어떤가?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우리가 깨어져야 하나님은 거기에 물을 주실 수가 있고. 그럴 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법이지”
“우리 수도사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얘기한다네.”
(깨달음)어떻습니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참생명 영원한 생명을 덧입기 위해서는 죄와 사망의 생명을 깨트린 채 주님의 새생명을 공급받는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나를 만질 수 있도록, 나를 다루시도록, 나를 깨트려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쓰임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음성)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들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주님, 나는 참 연약한 자예요. 주님의 참생명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나를 깨트릴 수 있게 해 주세요.”
“주님의 참생명 주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쓰임받도록 저를 사용해 주세요.”
“내 주변에 아파트 경비원과 같은 분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참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 해 주세요.”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셨사오니, 제가 그와 같은 주님의 참생명 주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 해 주세요.”
(찬양)나의 모습 나의 소유 주님 앞에 모두 드립니다
모든 아픔 모든 기쁨 내 모든 눈물 받아주소서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기쁨의 제물 되리 나를 받아주소서
어제 일과 내일 일도 꿈과 희망 모두 드립니다
모든 소망 모든 계획 내 손과 발을 받아주소서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기쁨의 제물 되리 나를 받아주소서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 첫 번째 주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내 주시려 십자가에 고난받으신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새 생명을 주시려 주님의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생명의 삶, 생명이 그에게 있다(행20:7-12)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살아가는 삶이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일구는 삶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참생명, 주님의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하고 주님 앞에 함께 기도를 드리도록 하시겠습니다.
그리하여 유두고의 생명을 통해 주변 사람들이 기쁨을 얻고 주님의 참생명 영원한 생명을 갈망했듯이,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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