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논지) 나이가 들어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세워주고 물러날 때 물러나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죠.
정치인들도 그렇고 기업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정치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한 이들은 끊임없이 선거판에 기웃거리게 됩니다.
기업가도 90대 중반이 되기까지 회장직에 머물러서 욕망 속에 파묻혀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보통의 사람들은 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목회자도 마찬가지요, 성도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물러날 시기에 물러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성도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은 분들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게 보기 좋은 모습이죠.
그래서 노인(老人)이라는 말은 듣기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노인이라는 말 자체에 쇠하다, 늙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말이죠.
노인이 되면 무엇보다도 총명함과 지혜로움이 느슨해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노인이라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시니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시니어’(senior)란 우리말로 ‘웃어른’을 뜻하는 말입니다.
노인은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노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시니어’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섬기는 사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만큼 ‘시니어’는 물러날 때를 바라보며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시니어가 될수록 더욱 존경받는 어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깨달음)룻기서에 등장하는 룻이란 여인도 마찬가지였죠.
그녀는 이스라엘과는 상관없는 모압 땅에서 태어났는데, 이스라엘에서 이주한 나오미의 첫째 아들과 결혼했죠.
그런데 10년 과정 속에 나오미의 남편도 죽고,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다 죽고 말았죠.
그때 나오미가 이스라엘 본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할 때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결국 모압으로 돌아갔고, 룻만 따라나섰죠.
그런데 나오미를 따라 낯선 이스라엘 땅에 들어간 룻이 맞이한 환경은 어땠습니까?
집도 큼지막했고, 전답이 풍성했고, 먹을 게 넘쳐났습니까?
아니죠. 10년만에 돌아온 나오미의 고향 땅, 룻이 발은 그 낯선 환경의 베들레헴 땅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죠.
결국 룻이 한 일은 힘없는 시어머니를 봉양코자 낯선 사람의 밭, 곧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주워 먹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어머니의 빨래와 갖가지 봉양을 하며 섬김의 삶을 살았던 룻입니다.
바로 그런 과정 속에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는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게 되었죠.
(적용) 우리도 가진 게 있든 없든, 환경이 넉넉하든 어렵든, 우리 각자의 삶에서 ‘시니어’가 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수준에서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을 섬길 때, 그것이 주님께 칭찬받는 시니어요, 그것이 아름답게 천국을 맞이하는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지난 시간에 우리는 에베소의 구리세공업자 데메드리오의 주동으로 온 시민들이 연극장으로 몰려간 일을 살펴봤었죠.
에베소의 수많은 시민들이 연극장에 달려들어가 벌인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란 자가 나타나 에베소의 시민들이 섬기고 있는 아데미 여신을 우습게 만든다는 것이었죠.
25만명 가량 달한 에베소의 시민들은 직간접적으로 모두가 아데미 신을 숭배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고 했죠.
그런데 바울이란 자가 나타나 아데미 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선동을 벌인 데메드리오는 그 목적이 에베소의 신이 훼손당하기 때문이 아니었죠.
자기들의 주업인 아데미 신을 본떠서 만든 작은 부적상을 팔아먹는 일이 어렵게 되기 때문에 그 일을 주동한 것이었죠.
그때 바울과 함께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끌고서 연극장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그 연극장에서 2시간 가량 아데미 신을 열광하고 찬양하는 집회를 가졌죠.
그 모임은 군중심리에 이끌린 집단 최면에 빠진듯한 모임이었죠.
그렇게 열광하면서 집회와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 그때 그곳의 서기장이 군인들을 동원해서 해산시켰죠.
이유인즉, 그 바울이란 자가 아데미 신을 모독하거나 신전의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직접적으로 민회에 고발하여 심문을 받도록 하라는 뜻이었죠.
그만큼 그 시민들이 연극장에 몰려들어와 집회를 벌이는 일은 불법집회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일로 그 모든 사람들의 모임을 해산시켜버렸습니다.
(깨달음)우리는 그 모습과 관련하여 깨달은 바가 있었죠.
이 세상에는 그런 종교적인 집회의 모임도 있고, 정치적인 민회와 같은 모임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집회는 모두 자기 잇권과 관련된 모임들이라고 했죠.
하지만 그 속에 끌려간 가이오와 아리스다고 그들 두 사람의 모임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모임이라고 했죠.
그들이 거대한 군중 속에 두 사람으로서 초라하지만 주님은 그들 두 사람 가운데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한 모임이요, 주님의 영광을 위한 모임 곧 진정한 에클레시아의 모임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증언해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깨달음)‘소요가 그치매’하는 말씀은 연극장에 들어간 사람들의 소란과 난동이 끝났다는 말씀입니다.
그 소요가 그치게 된 게 서기장이 군대를 동원해서 해산시킨 것이지만 더 큰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이었죠.
하나님의 주도속에서 그 소란과 난동이 끝나자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주님의 제자들을 불러모아 권면한 후에 작별하게 되죠.
그리고 마게도냐로 떠납니다.
마게도냐란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유럽대륙에 발을 내딛은 그곳을 말하는 것이죠.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가 마게도냐 지역 말이죠.
그리고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렀다고 밝혀줍니다.
바로 그 헬라 지역이 고린도 지역을 말하는 것이죠.
(원성)그런데 바울이 이때 에베소에서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간 것 같지만 실은 복잡한 문제가 엉켜 있죠.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사역을 펼칠 때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들이 들려왔고, 바울은 2번에 걸쳐 방문했고, 네 번에 걸쳐 편지를 써 보냈죠.
그 중간에 디모데를 보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코자 했지만 안 됐고, 디도를 보내서 해결코자 한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절을 보면, 바로 그 디도를 보낸 후에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 항구에서 배타고 마게도냐로 건너간 것입니다.
디도는 고린도교회 문제를 해결하고 아테네, 베뢰아, 데살로니가, 그리고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드로아로 건너오는 상황이죠.
바로 그 중간에 바울이 디도를 만나 고린도교회의 해결방안을 듣고 너무나 기뻐했던 것이죠.
(본문2) 그리고 본문 3절은 이렇게 증언을 해 줍니다.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원해)바울이 ‘거기 석달 동안 있었다’하는 곳은 고린도 교회에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석달 동안 있었다’고 하니, 그냥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있었다’는 헬라어 원어 ‘포이에오’(ποιέω)는 ‘만들다’(make), ‘행하다’(do)는 단어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곳의 형제 자매들의 믿음을 북돋아주면서 그들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물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다였을까요?
그렇지 않죠.
바울은 그곳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믿음을 북돋아주고 복음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로마서까지 써서 보냈습니다.
그곳 로마서는 바울이 19장 21절을 통해, 자신의 최후 목적지, 자기 생의 마지막 목적지가 로마였음을 암시한 바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머잖아 만나야 할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해 그곳 고린도에서 심혈을 기울여 로마서를 써 보냈던 것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 같습니까?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들렀을 때는 50대 초반이었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고린도에 들렀을 때는 6년이 지난 상황으로 50대 중반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인생 종착지이자 복음의 종착지인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서 참수형 당할때는 50대 후반이었습니다.
바울은 인생 마지막까지 떠날 때를 바르게 알았고, 그 마지막까지 섬김의 삶을 다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존경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가 나이가 들어갈 때 저절로 늙어가는 노인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섬김을 다하는 ‘시니어’가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나이가 들어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잘 구별할 수 있겠느냐?”
“나이가 들어 노인으로 사는 것과 시니어로 사는 것을 구별할 수 있겠느냐?”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의 사역을 마치고 물러하고 떠날 때에 확실하게 떠나지 않았더냐?”
“바울은 고린도에 들어가서 그냥 대접만 받은 게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섬기고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편지를 쓰면서 섬기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이가 들면 어른이 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 같지만 참된 어른은 진정한 섬김을 수반한다는 걸 잊지 말도록 해라.”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린 아이들과 젊은 사람들을 세우고 섬기며 사는 것이 진정한 시니어의 모습이니 말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십자가에 물과 피를 다 쏟으면서까지 당신의 생명을 섬기지 않았더냐?”
“너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네 것을 고집하지 않고 더 많은 이들을 섬기는 바울처럼 살았으면 좋겠구나.”
(찬양)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예화)오래전에 모 재벌그룹의 창업주가 아들이 주도한 이사회를 통해 해임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창업주의 두 아들 사이에 시작된 재산 다툼이 결국은 부자지간의 다툼으로 확대된 일이었죠.
그 일로 그 아들은 부자를 내친 패륜아로 낙인 찍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에게 해임당한 아버지를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당시 아들이 주도한 이사회에서 물러나게 된 그 창업주 아버지의 나이가 94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70세에 깨끗하게 물러났던 다른 창업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이죠.
그만큼 나이가 들면 판단력이 순발력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적정 나이가 되면 뒤로 물러나는 게 참된 시니어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죽을때까지 욕심을 갖고 살아간다면 진정한 노인으로 존경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70세에 깨끗하게 물러났던, 그래서 더 젊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토대로 만들어 준 그 창업주야말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참된 ‘시니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예화2) 이동원 목사님이 전도사로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선명회 총재였던 스탠 무니햄 박사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날 부산 구덕 체육관에서 집회를 열게 되었죠.
그때 이동원 전도사님이 집회 통역을 맡게 된 것이었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그가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열심히 통역했습니다.
그 날밤 집회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진행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숙소로 돌아왔을 때 부산 시내의 많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이동원 전도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매우 은혜로운 집회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동원 전도사를 향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통역 잘하고 목소리와 외모까지 좋은 사람은 처음 본다면서 말입니다.
그때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정말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아도취에 빠졌다고 합니다.
‘아, 드디어 내가 한국 교회에서 떠오르는 샛별이 되는구나’
그러면서 너무나 기분이 좋아,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저녁 집회가 열렸고, 또 다시 그는 통역을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집회가 시작된 지 5분쯤 지나자 목이 완전히 잠겨 버렸습니다.
통역이고 뭐고 목소리 자체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죠.
소리를 내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결국 포기하고는 다른 목사님께 통역을 부탁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집회가 끝나기도 전에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체면 손상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밤 12시가 지나자 갑자기 마음에서 조용한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동원아, 그 목소리가 네 목소리더냐? 통역하는 능력이 너의 능력이더냐?”
“내가 준 선물, 내가 준 은사, 내가 준 목소리, 내가 준 능력을 가지고 하면서 왜 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느냐?”
그와 같은 주님의 음성 앞에, 그는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려 한 것을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리고서는 성경을 펼쳤는데 시편 115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그 말씀 앞에 마음이 찔렸고,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눈물로 얼굴을 적시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그는 커다란 손이 그를 붙잡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를 의지하고 겸허하게 사역을 계속해라.”
그 음성과 함께 그는 깊은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셋째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성도들이 걱정되는 눈빛으로 이동원 전도사를 바라보게 되었죠.
그런데 그때 다시금 기회를 얻어 통역을 하는데, 첫날과 똑같은 목소리가 되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은혜 가운데 무사히 집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깨달음)지금은 지구촌교회에서 은퇴한 목사님이지만, 그때 그 사건을 거울삼아 은퇴한 후에도 잘 섬기는 목사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은퇴 후에도 자기 자신을 높이고 싶은 유혹이 올 때마다 부산에서 새벽을 맞이하며 엎드렸던 그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죠.
우리도 그 목사님처럼,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늙어가면서도 주님을 높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음성)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예요.”
“내가 사망과 지옥에서 생명과 천국으로 부름받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 때문이예요.”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주님의 전적인 부르심의 은혜 때문이예요.”
“이런 제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해 주시고, 끝까지 잘 섬기는 진정한 시니어로 살게 해 주세요.”
“이동원 목사님도 교만이 차오를 때면, 높아지고 싶은 유혹이 올 때면 부산의 그 집회를 기억한다고 했어요.”
“바울도 스스로 높아지고자 할때면 다메섹 도상에서 찾아와주신 주님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겠어요?”
“저도 주님께서 천국으로 부르시는 그 날까지 더 섬기고 사랑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주님의 시니어로 살게 해 주세요.”
(찬양)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34살에 주님의 부름을 받아, 50대 초반에 1차와 2차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50대 중반에 에베소 사역을 3년간 마치고 6년 전의 고린도교회에 돌아보고자 갔습니다.
그러나 놀러간 것도 아니고, 자기 이름값을 자랑하고자 한 것도 아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돌보고 복음으로 권면코자 함이었죠.
에베소에서 떠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할 때를 잘 알고 결단했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들어갔을 때는 대접받고자 간 것도, 쉬러 간 것도 아니요, 성도들을 섬기고 로마서까지 쓰는 섬김의 삶을 살고자 함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사랑하고 섬김을 다하는 진정한 주님의 시니어로 천국을 준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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