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성화) 주일날 우리가 살펴봤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와 애굽에서 건져내주셨습니다.
그때 6개월간에 걸쳐 하나님의 10가지 심판의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죠.
그 후 시내광야에 당도하기까지의 50일기간도 마찬가지였죠.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마른 땅처럼 통과하게 해 주셨죠.
신 광야에 당도할 때 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죠.
그리고 르비딤에 당도했을 때는 반석에서 생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런 기적들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의 주관자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알다’는 것은 단지 눈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머리와 심장에 새기도록 하라는 뜻이었죠.
그런 그들이 시내광야에 당도해 7개월에 걸쳐 성막을 만든 후 행진을 했습니다.
그리고 2주일만에 ‘가데스 바네아’란 지점에 당도해서 40일간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오도록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죠.
그런데 그 정탐꾼들이 모두 동일한 보고를 했습니까?
“우리는 능히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는 능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2명의 정탐꾼 중에 10명이나 되는 정탐꾼은 낙담하는 보고를 했죠.
“저 가나안 땅에는 거대한 아낙 자손이 있어서 우리는 메뚜기 떼에 불과할 뿐입니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그 땅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생각하기보다 오직 현실에만 급급한채 분란이 일어나고 말았죠.
그때 군중심리에 휩쓸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셨는지, 왜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 생각하지 않았죠.
오히려 그 말을 들을 때 군중들 모두가 들고 일어나서 모세와 아론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일이 벌어졌죠.
(깨달음)물론 그때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 일을 수습해주셨지만, 그 일로 인해 그들은 광야 38년을 뺑뺑 돌아가야 했죠.
그 일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토록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격했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와 뜻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눈이 있어 볼 수 있고 판단할 수 있지만,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란 사실을 그들은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적용)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도 1차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것을 토대로 알고서 믿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평면처럼 보이지만 결코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참된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영원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참된 믿음이란 군중심리에 이끌려 평면만 보는 시선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서 3년 가까이 머물고 있는 상황입니다.
에베소의 브리스길라 부부 집을 예배당으로 삼아 주일 예배를 드렸고, 평일이면 천막을 만들면서도 점심 오수 시간에 복음을 전했죠.
이른바 티란노스의 스콜레, 곧 두란노 상가를 빌려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그때 천막 만들 때 사용하던 천조각과 앞치마 격의 보자기로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에게 얹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죠.
그 모습을 바라본 스게와 제사자장의 7명의 아들들이 귀신들린 사람에게 바울처럼 흉내를 내보기도 했죠.
하지만 귀신들린 사람의 귀신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들은 누구야?’하면서 오히려 7명을 제압해버렸죠.
그런 일들과 함께 에베소의 마술사들이 여태껏 사 모은 책들이 은전 5만 드라크마나 됐는데, 그 모든 책들을 불태운 채 주님께 나오기도 했죠.
그런 일들이 모두 주님께서 역사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례적인 일들을 통해 주님께서 진정한 구원자와 참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에베소 사람들에게 생명의 주관자임을 알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죠.
그런데 주님의 복음이 놀랍게 역사하는 동안 한쪽에서는 방해꾼이 등장하기 시작했죠.
에베소의 은장색,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상을 본떠서 작은 부적상을 만들어 팔던 데메드리오라는 구리 세공업자가 그였죠.
그는 바울 때문에 자신들의 소득이 줄어들 것 같은 생각에, 동종 업계 사람들을 불러모아 시민들을 선동해서 연극장으로 달려갔죠.
그의 논리와 명분은 에베소의 신 아르테미스 신이 위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란 자가 나타나서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고, 또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자 아르테미스 신이 천하게 취급받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그의 논리였을 뿐 속으로는 자신의 업, 곧 부적상을 팔아 수입을 올리던 소득이 줄어들 것을 내다본 것이었죠.
그때 그를 필두로 동종업계 사람들과 시민들까지 합세해서 연극장으로 몰려가는데, 그때 바울과 같이 다닌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갔죠.
그때 바울은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끌려가듯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직접 나서서 해결하고자 했죠.
하지만 바울의 동료 중에 관리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리는 바람에 바울이 나설 수가 없었죠.
이를테면 지금 들어갔다가는 완전히 돌에 맞아 죽거나, 집단 구타를 당해서 죽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만큼 연극장에 달려들어간 수많은 무리들은 집단적으로 광분한 상태라 그들의 이성을 바로잡기는 마땅치 않다는 뜻이었죠.
(깨달음) 그래서 지난 시간에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데메드리오가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시민들을 선동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속내를 분명히 알고 계신다는 것이었죠.
그만큼 우리 자신이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명분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32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원해)이는 연극장에 들어간 사람들이 2시간 동안이나 ‘에베소의 아데미여, 에베소의 아데미여’하고 찬양하는 모습을 일컫는 것입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함께 연극장에 들어가서 아르테미스 신을 향해 소리지르고 열광을 하긴 하는데, 분란이 일어났다는 뜻이죠.
여기에서 우리말 ‘분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슁케오’(συγχέω)인데, 이는 통 속의 물을 쏟아붓는 광경을 말합니다.
통에 든 물을 쏟아 붓는데 사방을 튕겨 나오는 광경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로 일치되지 못한 혼란스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엄청난 군중이 은장색들을 따라서 야외 연극장으로 밀려들어 저마다 소리를 질러 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견이 일치되거나 뜻이 맞아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닌 것이죠.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땅에 튕겨나오는 물처럼 그 연극장에 몰려든 군중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이죠.
누구 하나 질서정연하게 지금 무엇 때문에 모인 것인지, 왜 이런 선동을 벌이는지, 왜 이런 일을 해야하는지 알지 못한채 말입니다.
(깨달음) 왜 그렇습니까?
그들 가운데 ‘태반이나’ 되는 사람들, 그 연극장에 들어온 사람들중에 생각하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죠.
이것은 마치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12명 중에 악평을 한 10명의 말에 휘둘려 다들 모세를 죽이려고 돌을 들고 달려드는 군중과 같은 모습인 셈입니다.
더욱이 이것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칠 때는 자신들의 왕으로 옹립하려다가,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힘없이 사형언도를 받을 때는 다들 십자가에 죽이라고 소리치는 군중과 같은 모습인 것이죠.
(원해2) 왜 이들이 이런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본문 32절 마지막 부분에 ‘알지 못하더라’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알지 못한다’는 우리말 ‘알다’는 헬라어 ‘에이도’(εἴδω)는 ‘보다’(see)는 말입니다.
물론 1차적으로는 ‘보다’(see)는 말이지만 2차적으로는 보고서 ‘알다’(know)는 뜻이죠.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사람은 다른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상의 이치는 먼저는 바르게 봐야만 바르게 알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눈을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두 개의 눈을 주셨겠습니까?
이 세상은 단면적인 평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멀고 가까운 원근이 있고, 들어가고 튀어나온 요철이 있고, 높고 낮은 고저가 있고, 크고 작은 대소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루는 낮과 밤으로 구분되고, 시간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로 구분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눈에 보이는 가식적인 현실이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비가시적인 영원한 세상도 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의 눈으로는 1차적인 평면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눈으로는 입체적인 부분을 종합적으로 볼 수도 없고, 그저 눈에 보이는 현실만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두 개의 눈으로 봐야 입체적인 것을 볼 수 있고, 현실 너머의 영적인 세계까지 내다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적용)지금 대선을 앞두고서 각 당에서 사람들에게 주장하는 부분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정말로 두 눈을 뜨고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면 그저 평면밖에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선거 전략가들은 군중심리를 부추기고자 눈에 보이는 1차원적인 것을 들이미는 것이죠.
마치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서도 ‘거대한 아낙 자손이 버티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소리치는 군중들처럼 말이죠.
힘없이 재판받는 예수님을 두고서도 메시아이기는커녕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치는 군중들처럼 말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의 눈으로 평면적인 시각을 벗어나 입체적인 시각, 현실 너머의 영원한 세계를 볼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하나님께서 왜 두 개의 눈을 주셨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이 세상은 평면의 세계만이 진실이 아니라 입체적인 면을 볼 수 있도록 두 개의 눈을 주신 게 아니겠느냐?”
“진리와 생명을 보지 못하면 현실의 것에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지 않겠느냐?
“이스라엘 군중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내다보지 못한 채 현실의 문제만 불평한 것처럼 말이다.”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한 채 힘없는 예수님만 보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친 군중들처럼 말이다.”
“지금 연극장에 달려가 아르테미스 신을 떠받들지만 무슨 영문인지도 알지 못한 에베소의 시민들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에게 두 개의 눈을 주신 것으로 바르게 보고 분별하며 살았으면 좋겠구나.”
“이 세상의 현실만을 보는 평면의 눈이 아니라 이 세상 너머의 영원한 진리와 생명을 보는 입체적인 눈을 지녔으면 좋겠구나.”
“군중심리에 이끌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현실의 문제만 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힘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친 군중들과는 달리 오직 부활의 주님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길 원한다.”
“에베소의 연극장에 영문도 모른 채 난동을 피우는 군중들과 달리 오직 너는 말씀 안에서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살기를 원한다”
(찬양)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예화)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곳입니다.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눈물 을뿌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왜 이런 일을 허용하고 계십니까?”
그들의 피맺힌 절규는 연합군이 독일을 물리쳐 수용 소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이 이제 탈환한 수용소를 점검하러 들어갔습니다.
점검하던 연합군 병사중 한 명이 한쪽벽의 후미진 곳에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벽에는 어느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 같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찬양)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0
(깨달음) 연합군 병사가 수용소 한 쪽 벽에 새겨진 그 신앙고백을 읽을 때, 우리들처럼 저절로 찬양이 흘러나왔겠죠.
그때 그는 그렇게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 유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연합군 병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독일 나치의 잔인한 수용소에서, 매일 같이 죽어나는 유대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밑에 또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적용) 무엇을 생각하게 해 주는 것입니까?
그 유대인은 자신이 갇힌 포로 수용소를 단면적으로, 평면적으로만 본 게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봤다면, 다른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만 하다가, 신앙을 저버렸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두 개의 눈을 지닌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갇힌 수용소의 현실을 평면적으로 본 게 아니라 입체적으로 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용소에 갇힌 유대 군중들처럼 하나님은 이곳에 없다고,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라고 소리 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갇혀 있는 이 포로 수용소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에게도 믿음의 눈을 열어주세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평면적으로만 보지 않게 해 주시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열어주세요.”
“아무리 춘설이 몰아친다고 해도 매화는 꽃필 시기를 준비하는 것처럼 혹독한 고난이 닥쳐와도 주님의 소망을 품게 해 주세요.”
“10명의 정탐꾼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불평하고 악담할지라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해 주세요.”
“에베소의 연극장에 몰려들어 의미없이 소리치고 난동을 피우는 군중들보다 바울처럼 그곳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열어주세요.”
“제 삶에 어떤 환경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눈 앞의 현실만 보기보다 그 너머에 나와 함께 하실 주님을 신뢰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이 내 발에 빛이요 내 길에 등불임을 놓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1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눈을 주신 것은 이 세상의 일들을 평면적으로 보지 않고 입체적으로 보도록 하기 위함이십니다.
눈 앞의 현실만 볼 게 아니라 그 너머의 영원한 진리와 생명을 보며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가나안 땅을 보고 온 정탐꾼 중에 10명의 정탐꾼 역시 눈에 보이는 아낙 자손만 의식할 뿐 하나님은 바라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에베소의 연극장에 달려들어 아르테미스 신을 찬양하는 그 군중들 역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은 지금 눈 앞에 닥친 현실만 바라보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현실 너머의 진리와 생명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도록, 주님께 이 시간 기도를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하나님, 군중심리에 이끌려 살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세상의 것을 평면만 보지 않고 입체적으로 현실 너머의 것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이 세상의 것들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주님만 의지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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