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성화)마가복음 9장 17-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고쳐주지 못했죠.
그래서 예수님께 직접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귀신이 들려서 거품을 품고 쓰러지곤 했습니다.
더욱이 그 아이 속에 든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물과 불에도 던지곤 했습니다.
그만큼 귀신의 능력이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아이의 귀신을 내쫓으셨습니까?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막9:25)
예수님께서는 그 귀신을 향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하고 명령하셨죠.
그러면서 ‘그 아이게에서 나와라.’하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 귀신이 경련을 일으키면서 그 아이에게서 떠나갔죠.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까?
귀신의 세력이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아이를 물과 불에 던져넣고자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대단한 귀신의 역할과 활동은 제한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만큼 귀신의 능력이 대단해 보여도 주님은 훨씬 더 크고 더욱 강하신 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주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분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주님의 말씀 자체가 권능이 있고 힘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파도와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능력이 있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죠.
그만큼 주님의 말씀은 천지를 지으신 말씀이고, 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씀으로 귀신을 향해 명령할 때 어찌 귀신이 벌벌 떨면서 떠나가지 않았겠습니까?
(적용)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것이죠.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믿음 속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삶에 악한 영적 세력들이 흔들어대고 환란에 휩싸이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탄의 세력 곧 그 어떤 귀신의 세력이 위협하고 흔들어대도 주님께서 그 세력들까지 다 제압하셨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주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까지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믿는 자라면, 그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라면 어떤 귀신의 세력까지도 능히 이기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이 티란노스의 스콜레 곧 두란노 상가를 빌려 점심 오수 시간에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죠.
그렇게 하기를 2년 넘게 했습니다.
그때 천막 만들 때 사용하던 천조각과 보자기 격으로 두르던 것으로 귀신들린 자에게 얹을 때 귀신이 떠나갔죠.
또 그것으로 병든 자에게 얹을 때 병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 일들이 에베소의 제자들과 에베소의 시민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이례적인 일처럼 보이지 않았겠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께는 그 일이 놀라운 일 곧 이례적인 일일까요?
그렇지 않죠.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께는 그런 일들이 손쉬운 일이요 어쩌면 하찮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이 손수건과 앞치마와 같은 그 천조각들로 그런 일을 행하신 것은 주님의 깊으신 뜻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궁극적으로 그런 이례적인 기적에 몰두하지 말고 그 기적을 행하신 주님께 집중하여 주님을 믿고 의지하도록 하신 것이죠.
만약 그런 이례적인 일에만 몰두하면 아픈 사람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은 매번 바울의 천조각만 붙잡고 늘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고침받고 귀신이 떠나간다 한들 그들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죠.
(깨달음)그만큼 그와 같은 이례적인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이례적인 이들의 은혜를 베푸실 때 그 사건에 집착하지 말고 그 능력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더욱 신뢰하라는 뜻이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 자체를 보라는 것 말입니다.
파도와 풍랑이 잠잠할 때 잠잠해진 파도와 풍랑만을 볼 게 아니라 그 능력을 행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죠.
그러니 바울이 손수건과 앞치마로 기적과 능력을 행할 때 그것만 볼 게 아니라 그것을 행하신 주님을 신뢰하라는 뜻이죠.
그래야 믿음의 본질을 놓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원해) 여기에서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은 헬라어로 ‘ἐξορκιστής’(엑소르키스테스)라고 돼 있습니다.
‘무당’이라는 의미죠.
그 유대인 무당들은 에베소의 붙박이 무당들이 아니라 돈벌이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떠돌아다니는 무당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걸 목격한 사람들이라 그대로 흉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귀신을 향해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명하노라’하는 헬라어 단어는 ‘ὁρκίζω’(호르키조)입니다.
그 뜻은 ‘간청하다’는 말입니다.
떠돌이 무당들은 바울이 하는 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귀신더러 ‘나가주세요’하고 호소한 거죠.
(깨달음)어떻습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방법입니까?
바울이 행한 방법입니까?
우리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을 때, ‘귀신들아, 나가주라 제발!’ 이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향해 ‘단호하게’ 명령했고 바울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에 들어와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그때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들은 그 여종을 통해 돈벌이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계속 방해하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은 그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쫓아 내버렸죠.
그때 바울이 행한 모습이 사도행전 16장 18절에 기록이 돼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적용) 바울은 그 귀신을 향해 ‘귀신들아, 나가주라!’하고 간청한 게 아니라 ‘귀신들아 나가라.’하고 명령하고 선포한 것이죠.
우리들도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귀신을 향해 명령하고 선포해야 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악하고 더러운 귀신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가라.’하고 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귀신이 제 아무리 능력이 있어 보여도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이라는 것입니다.
귀신의 역할과 활동은 항상 하나님의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하고 담대하게 선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선포할 때 무당의 주문하는 것과는 달리,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선포했다는 것이죠.
우리도 귀신이 떠나갈까, 그것을 염려하기보다, 또 내 죄가 있는데 가능할까,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귀신을 향해 명령하고 선포하는 것은 내 의를 드러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내가 비록 죄가 있고 연약한 허물이 있을지라도 내가 그때 선포하고 명령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2)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 무당들만 바울이 한 것을 흉내내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도 흉내냅니다.
본문 14절에는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7명의 아들이 귀신들린 사람의 귀신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귀신들린 사람 속에 있던 귀신이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들은 누구냐?’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귀신 들린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이 그 7명을 짓눌러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7명의 아들들이 모두 벗은 몸으로 귀신들린 사람의 집에서 도망쳤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걸 목격한 에베소 사람들, 소문을 들은 에베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였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의지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죠.
왜죠?
그 일은 바울처럼 흉내내서 될 일이 아니라 바울처럼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역사하는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에베소의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 에베소가 어떤 도시인가 하는 것이죠.
그곳 에베소는 아데미 신전이 있는 곳이고, 수 많은 장사꾼들이 에베소 신전 앞에서 절을 하고 비는 곳이죠.
그런데도 그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 신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본문3)그런데 그 와중에 또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믿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본문 19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원해) 여기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란 ‘마법사’를 가리킵니다.
헬라어 원문은 ‘περίεργος’(페리에르고스)입니다.
그 뜻은 ‘사소한 일에 바쁜’(busy about trifles), ‘쓸데 없는 일에 참견하는’ 이란 의미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마술을 행하는 것 자체가 아무런 쓸모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을 현혹해서 눈 속임을 하는 것 자체가 정말로 사소한 일에 바쁜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마법사들조차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사람이 고침받는 역사가 주님께로부터 일어나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입니까?
그들이 여태 애지중지하던 마법책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 버린 것이었습니다.
(깨달음) 사실 그 마법 책들은 그들에게는 돈벌이의 원천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미련 없이 그 책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왜죠?
그들도 바울을 통해 역사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들의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신들이 해 오던 일들, 곧 쓸데없이 바빴던 지난 날의 삶을 청산하고자 그 책들까지 불태워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책값의 합계가 ‘은화 오만 드라크마’였습니다.
당시 은화 1드라크마는 한 사람의 하루분 임금에 해당되는 액수로서, 은화 5만 드라크마는 한 사람이 5만 일을 해야 받는 임금입니다.
한 사람이 1년 365일을 쉬지 않고 일한다면 137년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무엇을 깨닫게 해 줍니까?
에베소의 마법사들이 에베소 시민들에게 쓸데없는 짓을 하기 위해 그 정도로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에베소 시민들도 쓸데없는 그 짓을 하는 마법사들에게 그토록 많은 돈과 정성을 쏟아부었다는 뜻이죠.
그러니 그 마법사들과 에베소 시민들이 쓸데 없는 짓에 시간과 정성과 돈을 쏟아 붓느라 얼마나 많은 것을 잃으면서 살아왔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죠.
정말로 귀중한 것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붇지 않으면 헛된 것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을 뿐입니다.
주일날 말씀을 전해도 그 마음과 정성이 다른 데 쏟아붓고 있다면 주님의 말씀에 들어올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에베소의 마술사들과 시민들이 바로 그런 모습처럼 여태껏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다 던져버리고 주님께로 향한 것이죠.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빠른 때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적용) 중요한 것은 이런 일련의 일들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귀신의 세력을 이기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 아니겠습니까?
(주문) 그렇기에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흑암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그 세력을 물리치는 능력과 세상을 이기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이죠.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이 세상의 흑암의 세력들 그 귀신들의 세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주님 앞에는 아무런 것도 아님을 알고 있느냐?”
“그 귀신들의 세력이 이 세상을 주도하고 활개를 칠지라도 하나님의 제한성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그 부모의 아이를 귀신의 세력이 물과 불에 던지고 벙어리 되게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런 것도 아님을 알고 있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때로 너를 혼미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흑암의 세력들이 너를 뒤흔들 때 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해야 한다.”
“그 귀신을 향해 떠나가라고 타협하지 말고 과감하게 물러가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 귀신의 세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귀신은 벙어리 되고 귀먹은 존재임을 잊지 말도록 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셨기에, 너도 이 세상의 흑암의 세력들을 향해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도록 해라.”
(찬양) 성령 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 살리소서
성령 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0
(발췌) 주명식 목사님의 〈무당 엄마 목사 아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렸을 적 인천 용유도에 살았는데 지금은 그곳에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는 곳이죠.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배를 가지고 바닷가에 나가 고기를 잡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시절 외할머니는 무당으로 살고 있었죠.
바닷가 사람들이 무속신앙에 빠져 있듯이, 그의 부모님들도 풍어제를 지냈고, 정화수를 떠서 칠성신에게 비는 분들이었습니다.
어린 주명식도 어렸을 땐 그렇게 살았고, 고등학교 때 이모님의 전도로 처음 교회에 나갔습니다.
대학시절에는 선교단체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신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 너무 괴로웠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사해 주시는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은 후에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군대에 입대했죠.
6개월 동안 근무하는데 집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어머니가 인천의 철마산 굿당에서 내림굿을 하여 무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태껏 그곳에서 누구하나 타보지 않는 외작두를 타는 무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를 휴가 때 찾아뵈었을 때에는 너무나 원망스러웠죠.
자신은 나중에 목회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는데 어머니는 무당이라 너무나 얄밉고 답답한 것이었죠.
그런데 다시 군에 들어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 어머니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면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죠.
군대에서 전역한 후에는 아들이 어머니를 돕지 않는다면서 아버지로부터 쫓겨났습니다.
대전에까지 내려가 살았는데, 그러면서도 어머니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급기야 신학대학원에 갔는데, 그때부터는 어머니의 손님이 끊기기 시작했습니다.
잘 나가던 무당 엄마의 신기, 아무리 작두타는 무당도, 3-4년이 지날 때 약발이 다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신대원 졸업식에 어머니를 초청했는데, 어머니는 아들 체면 살려주려고 그곳에 참석했죠.
그런데 그 어머니의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토할 것 같은 구역질이 나왔죠.
하지만 아들 체면 살려주려고 끝까지 참았습니다.
그 무렵 두 분의 목사님이 어머니를 찾아와 전도를 했습니다.
저녁 7시부터 밤 11시까지, 그 분들은 그 집을 떠나지 않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분들에게 고춧가루와 소금을 뿌리면서 집을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은 굳게 그 자리를 지키며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무렵 집을 나간 어머니는 앞집 할머니를 만나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앞집 할머니도 신병이 들어 무당을 했는데, 온 가정이 풍비박산 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산 증인이라면서 “아들 이기지 못해, 아들 따라 가야 돼.”하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밤 11시에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복음을 영접했고,
그때 3천 만원에 달하는 모든 신주단지들을 다 불태워버렸죠.
그때부터 아들과 함께 예배당에 나가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 강대상에서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그 어머니에게 불이 떨어지는 것이었죠.
그리고는 그 어머니의 속에 있는 귀신이 “내가 졌다”하면서 떠나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어머니 속에 있던 19귀신들이 모두 떠나가는 은총을 덧입게 되었다고 하죠.
그때부터 무당으로 살며 찌들었던 어머니의 얼굴에 빛이 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이 그런 능력 아니겠습니까?
제 아무리 외작투를 타는 무당이라도, 3-4년이면 신기가 다 떨어지기 마련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그런 무당이라도 주님께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원해)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도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로 끝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력을 얻으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ἰσχύω’(이스퀴오)는 ‘강해지다’(to be strong는 뜻입니다.
귀신의 세력은 주님 앞에서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고, 대신에 주님의 능력은 점점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까지 모두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능력이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기에 그 어떤 흑암의 세력이 우리를 짓누른다할지라도, 우리도 주님과 함께 기꺼이 강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내음성)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까?
“주님. 나는 약하고 죄많은 죄인이지만, 내 속에 주님께서 계신 줄 믿어요.”
“이 세상의 어떤 흑암의 세력이 나를 유혹하고 나를 짓누른다 할지라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귀신의 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게 해 주세요.”
“아무리 작두 타는 무당이라 할지라도 그 신기는 3-4년이면 다 떨어지기 마련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해요.”
“그렇게 귀신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약해지지만 우리 주님은 날이 갈수록 더욱 흥왕케 하는 세력의 힘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 능력과 그 은혜로 저를 감싸주셔서 어떤 세력도 능히 물리치고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세요.”
(찬양)성령 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 살리소서
성령 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1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천막 만들 때 사용하던 천조각과 보자기로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에게 얹을 때 그 병과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그것을 떠돌이 무당들과 제사장의 7아들이 흉내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것은 주문처럼 외운다고 될 일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에베소의 시민들이 아데미 신을 믿고 있었지만 아데미 신보다 더욱 크신 주님을 믿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더욱이 마술사들도 이제까지 행한 일들이 쓸모 없는 일임을 깨닫고 은전 5만이나 되는 책을 다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만큼 이제부터는 쓸모 없는 일에 헛된 시간과 정성을 낭비하지 않고 오직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도 그와 같은 주님의 능력과 역사가 흥왕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의 의나 자랑이 아니라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이요, 오직 주님께 사로잡혀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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